기억의 기록
2025-07-07 (No.65)
사려 깊은 사람의 향기
어쩌다 보니 일터에서 업무상 협력이 필요한 외부 기관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이라 부르는 작은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소통하는 곳이 다양한 편이다. 회사의 인사와 노무 업무를 위한 노무법인부터, 세무법인, 특허 관리를 위한 특허업무 기관, 사업 부서별로 협업하고 있는 협력 업체까지 대충 그 숫자를 세어보니 서른 곳 이상 된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연락 오는 곳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여 난감할 때가 있다. 몇 번 그런 상황을 경험한 뒤로 연락처를 저장할 때 나만의 습관이 생겼는데, 전화가 오면 표시되는 이름에 그 사람의 회사, 직함, 어떤 이유로 연락을 나누었는지 핵심단어를 함께 적어두고 전화가 오면 기억을 더듬곤 한다. 오늘 글은 ‘사려 깊은 G'에 관한 것이다.
회사를 대신하는 소통역할은 언제나 쉽지 않은데, 나의 실수와 내 일하는 수준이 회사의 가치를 보여주기에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대화 상대로는 투자자가 있다. 스타트업이라는 작은 회사는 사업이 정상적인 단계에 들어설 때까지 준비하는 시간 동안 자금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돌봄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기획과 시장성이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는 동안 생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한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자와 대화에는 평소보다 훨씬 엄격한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다. 한 번의 실수가 회사의 가치가 되고 그 가치 판단이 투자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면, 조심하려는 마음은 노력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다.
대화와 소통에서 주의한다는 것은 한껏 나를 낮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요구사항을 적절한 언어로 정확히 전달하고, 요구받는 것 중에서 실천 가능한 것을 명료하게 표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상대 입장에서 듣기 편한 수준을 잘 찾아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떤 명확한 공식이 있다기보다는 상대에 따라 상황의 성격을 살피고 적정한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상식과 침착함을 더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몇 년간 이 일을 해온 입장에서 드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일을 호흡하듯이,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수완 좋은 전문가도 많이 있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런 축에 속하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런 축에 속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생적인 부족함이 있어도 회사의 대리인으로 역할에는 충실하기 위해서 애는 쓴다. 그렇게 애써서 소통한 뒤에 그 과정을 되감아 보면, 나의 언어는 차갑고 견고하고 높은 담벼락 같아 보인다. 여름 초입의 따뜻함, 봄 아지랑이의 어지러움, 가을빛 노을의 눈부심을 사랑하는 나에게 내가 쏟아놓은 차갑고 단단하고 매끈거리는 언어는 스스로에게 여전히 참 낯설고 싫다. 그렇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허술하고 틈 많은 언어가 투자자에게 전해지면 금방 다시 돌아올 칼날 위에 서서 걸어야 할 것을 알기에, 낯설고 서투른 언어를 마치 내 것인 양 오늘도 적어 나간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기관과 투자에 관해 풀어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번에도 새로운 담벼락을 세워야 하리라 예상하였지만, 투자기관 담당자 G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조금 달랐다. 사실 몇 번의 경험에서 기억하고 있는 투자 유치 업무 과정은, 우선 벼랑 아래로 내던져진 뒤에 다시 그 벼랑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튼튼한 몇몇이 벼랑 위 놓여 있는 길을 상처 입은 몸으로 달려서 완주해내야 한다. 기회는 공정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포기하는 것도 각자의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벼랑을 어떻게 오르고 있는지에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G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달랐다.
G는 투자 참여를 위한 과정을 설명해주었는데, 그 문장 속에는 그동안 투자를 위해 나눈 대화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감사한 배려가 있었다. 처음 해보는 과정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상담할 테니 편히 알려달라는 표현’이 진솔한 언어로 전해졌다. 그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마치, 따뜻한 차 한잔 내릴 때 방안 가득 채우는 신선한 향기처럼 온종일 마음속을 가득 채우며 감돌았다.
투자 유치하는 과정을 걸어갈 때 되도록 진실을 진심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진실은 쉽게 전해지지만, 진심까지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 때가 많다. 미심쩍은 진실을 검증하기 위한 질문은 쏟아지지만, 진심을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몇 번 그런 일을 경험한 뒤로는 나 역시 진실만 건조한 그릇에 담아 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G에게는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진심을 전하려 했다. 그렇지만 회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하지 못한 회신을 받았다. 그 회신에는 전하고 싶은 진심을 들여다본 이의 격려와 배려가 담겨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G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동안 G의 문장에 스며있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단어를 찾았는데, 상념에 빠져 북촌 길을 걷던 중에 ‘사려 깊은 이가 있는 곳’이라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G가 문장 속에 담아낸 사람 사는 힘을 더해준 그것이 사려 깊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투자 심사를 위한 공식적인 일정에 참여하면서 G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비록 짧은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지만, G의 사려 깊음이 억지로 꾸미거나 포장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 훈풍에 담긴 따듯함이나, 가을 해바라기를 비추어주는 햇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잠시 마주쳐도 되돌아보게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들이 몇 있는데, 나에겐 G가 그런 사람이다.
사려 깊은 사람의 언어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하다. 그 향기는 차가워진 마음을 데우고 시든 잎새에 생명의 기운을 다시 가져다준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심어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서 사려 깊은 향기를 기억하며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절망적인 일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다. 사려 깊은 이의 향기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언제라도 그 배려를 기억해낼 수만 있다면 용기를 다시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도 G처럼 사려 깊은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기에. 여름 바닷가 청량하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사려 깊은 사람의 향기
어쩌다 보니 일터에서 업무상 협력이 필요한 외부 기관과 소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스타트업이라 부르는 작은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소통하는 곳이 다양한 편이다. 회사의 인사와 노무 업무를 위한 노무법인부터, 세무법인, 특허 관리를 위한 특허업무 기관, 사업 부서별로 협업하고 있는 협력 업체까지 대충 그 숫자를 세어보니 서른 곳 이상 된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연락 오는 곳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여 난감할 때가 있다. 몇 번 그런 상황을 경험한 뒤로 연락처를 저장할 때 나만의 습관이 생겼는데, 전화가 오면 표시되는 이름에 그 사람의 회사, 직함, 어떤 이유로 연락을 나누었는지 핵심단어를 함께 적어두고 전화가 오면 기억을 더듬곤 한다. 오늘 글은 ‘사려 깊은 G'에 관한 것이다.
회사를 대신하는 소통역할은 언제나 쉽지 않은데, 나의 실수와 내 일하는 수준이 회사의 가치를 보여주기에 조심스러움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러운 대화 상대로는 투자자가 있다. 스타트업이라는 작은 회사는 사업이 정상적인 단계에 들어설 때까지 준비하는 시간 동안 자금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돌봄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기획과 시장성이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는 동안 생존하기 위한 힘이 필요한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자와 대화에는 평소보다 훨씬 엄격한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다. 한 번의 실수가 회사의 가치가 되고 그 가치 판단이 투자의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하면, 조심하려는 마음은 노력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에 가깝다.
대화와 소통에서 주의한다는 것은 한껏 나를 낮추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요한 요구사항을 적절한 언어로 정확히 전달하고, 요구받는 것 중에서 실천 가능한 것을 명료하게 표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상대 입장에서 듣기 편한 수준을 잘 찾아내야 하는데, 이것이 어떤 명확한 공식이 있다기보다는 상대에 따라 상황의 성격을 살피고 적정한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어찌 보면 상식과 침착함을 더한 감각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 몇 년간 이 일을 해온 입장에서 드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일을 호흡하듯이,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수완 좋은 전문가도 많이 있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런 축에 속하지 못한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런 축에 속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태생적인 부족함이 있어도 회사의 대리인으로 역할에는 충실하기 위해서 애는 쓴다. 그렇게 애써서 소통한 뒤에 그 과정을 되감아 보면, 나의 언어는 차갑고 견고하고 높은 담벼락 같아 보인다. 여름 초입의 따뜻함, 봄 아지랑이의 어지러움, 가을빛 노을의 눈부심을 사랑하는 나에게 내가 쏟아놓은 차갑고 단단하고 매끈거리는 언어는 스스로에게 여전히 참 낯설고 싫다. 그렇지만 몇 번의 경험으로 허술하고 틈 많은 언어가 투자자에게 전해지면 금방 다시 돌아올 칼날 위에 서서 걸어야 할 것을 알기에, 낯설고 서투른 언어를 마치 내 것인 양 오늘도 적어 나간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기관과 투자에 관해 풀어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번에도 새로운 담벼락을 세워야 하리라 예상하였지만, 투자기관 담당자 G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조금 달랐다. 사실 몇 번의 경험에서 기억하고 있는 투자 유치 업무 과정은, 우선 벼랑 아래로 내던져진 뒤에 다시 그 벼랑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튼튼한 몇몇이 벼랑 위 놓여 있는 길을 상처 입은 몸으로 달려서 완주해내야 한다. 기회는 공정하지만 살아남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포기하는 것도 각자의 선택이다. 이 과정에서 벼랑을 어떻게 오르고 있는지에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G와의 대화는 처음부터 달랐다.
G는 투자 참여를 위한 과정을 설명해주었는데, 그 문장 속에는 그동안 투자를 위해 나눈 대화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감사한 배려가 있었다. 처음 해보는 과정이라 내심 걱정하고 있는 사이에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 상담할 테니 편히 알려달라는 표현’이 진솔한 언어로 전해졌다. 그 문장은 길지 않았지만 마치, 따뜻한 차 한잔 내릴 때 방안 가득 채우는 신선한 향기처럼 온종일 마음속을 가득 채우며 감돌았다.
투자 유치하는 과정을 걸어갈 때 되도록 진실을 진심으로 전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진실은 쉽게 전해지지만, 진심까지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 때가 많다. 미심쩍은 진실을 검증하기 위한 질문은 쏟아지지만, 진심을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몇 번 그런 일을 경험한 뒤로는 나 역시 진실만 건조한 그릇에 담아 전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G에게는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진심을 전하려 했다. 그렇지만 회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하지 못한 회신을 받았다. 그 회신에는 전하고 싶은 진심을 들여다본 이의 격려와 배려가 담겨 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G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한동안 G의 문장에 스며있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단어를 찾았는데, 상념에 빠져 북촌 길을 걷던 중에 ‘사려 깊은 이가 있는 곳’이라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G가 문장 속에 담아낸 사람 사는 힘을 더해준 그것이 사려 깊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투자 심사를 위한 공식적인 일정에 참여하면서 G를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비록 짧은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지만, G의 사려 깊음이 억지로 꾸미거나 포장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봄바람 훈풍에 담긴 따듯함이나, 가을 해바라기를 비추어주는 햇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잠시 마주쳐도 되돌아보게 되고,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이들이 몇 있는데, 나에겐 G가 그런 사람이다.
사려 깊은 사람의 언어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하다. 그 향기는 차가워진 마음을 데우고 시든 잎새에 생명의 기운을 다시 가져다준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심어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서 사려 깊은 향기를 기억하며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절망적인 일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다. 사려 깊은 이의 향기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언제라도 그 배려를 기억해낼 수만 있다면 용기를 다시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도 G처럼 사려 깊은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기에. 여름 바닷가 청량하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누군가에게 위안이 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2025-07-07 (No.64)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핑계일 뿐이지만 고등학교 다니던 날에 공부에 매진하지 않았다. 하고 안 하고는 나의 선택이니 내 선택이 그랬다. 나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도 그러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나비효과에 빠져 있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캘리포니아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재난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당시 이론은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비효과는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이 1960년대 초에 기상 관측 중에 착안한 원리이다. 기상학자로서 날씨를 예측하기 힘든 이유를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로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나비효과이다. 나비효과는 이후에 물리학에서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자료 조사는 오로지 도서관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학업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아서 나는 대체로 머리가 참 나쁜 학생으로 여겨졌다. 남들 모두 중간고사 준비할 때 나는 나비효과나 찾고 있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고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왕 나비효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으니 흔히 생각하는 오해가 한가지 있음을 설명해야겠다. 나비효과는 작은 사건이 큰일로 변화무쌍하게 번져가는 것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작은 변화가 늘 큰 변화의 변수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이 어딘가에서는 태풍을 불러온다는 것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연관 관계를 충분히 입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비효과에 갖는 관심은 빌미였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까지 있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고 기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은 저녁도 건너뛰는 일이 일상이었다. 배는 고프고 머리는 무거웠지만, 적어도 두려움에 떨지는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일상처럼 찾아오는 폭언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발길질에 두려움에 갇혀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기에 그 시간을 피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나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안식처이고 피난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읽을 기회도 되었다. 어떤 날은 아무 코너나 가서 눈을 감고 책 한 권을 골라서 읽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간혹 소설 코너에서 마음에 꼭 들어오는 책을 만나게 되면 그날 하루 동안은 같은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조지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영락 생활> 이라는 책은 기억하기로 80번 이상을 읽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누군가의 생활을 읽으면서 나보다 더 힘든 인생에 위로받았다. 나는 당시에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을 쓴 작가라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도서관은 당시 나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여행지였다. 한동안은 추리소설에 빠져 살았는데 당시까지 나온 추리소설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용감한 형제 시리즈와 같이 세상 사람이 잘 모르는 작품까지 정말 탐독했다. 이 시리즈는 모험 집과 비슷했는데, 시리즈마다 유명한 해외의 새로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작품 속 도시를 묘사하는 장면에 매료되어 주인공과 함께 그 도시를 마음속에서 거닐곤 했다. 어떤 날은 얼마나 심취했는지 읽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에 숨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날은 두려움보다 흥미에 빠져 행복했다.
어느날인가 두 권의 책을 손에 잡았는데 그 책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품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당시 나는 잦은 폭력에 마음이 죽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고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매일 듣는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였으니까. 사람이 같은 말을 10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나를 욕하는 것이라면 화가 난다. 백번 정도 들으면 나에게 혹시 문제가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만 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곧 내가 된다. 나는 십만 번 정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부모님 두 사람 불화의 원인이고 씨앗이고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로 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믿었다.
"You'll be a beautiful butterfly - we’re all waiting for you!"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꽃들에게 희망을> 작품에서 아직도 생각나는 문장인데, 나는 저 문장을 읽고 참 오랫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의 기억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애벌레로 살다 밟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을 태어나서 처음 하게 되었다. 그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고, 만 번을 들은 말을 다시 한번 더 듣는 날에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도 있고 애벌레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보이는 곳마다 메모를 써서 붙여 놓고 잠들기 전에는 같은 문장을 계속 되새기면서 잠들곤 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죽지 말고 살아서 어른이 되자는 아주 사소하고 소박하고 목표라고도 할 수 없는 목적지였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적어도 아픈 말로 난도질하지 않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겼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받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받지 못한 것을 제대로 줄 수 있을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른이 되어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를 내려 놓지는 않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무는 결국 그루터기만 남는다.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 맺어 과실을 주고 가지도 모두 주고 나중에는 밑동만 남게 되지만, 사랑하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노년이 된 아이가 왔을 때 남아 있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는 마지막 장면이 사랑하는 감정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에게는 정말 큰 사랑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무엇이든 너에게 주고 싶은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늙어빠진 나무 밑동뿐이야. 미안해.” 나무가 말하자 늙은 남자는 “내게 필요한 것은 없어. 앉아 쉴 자리만 있으면 좋겠어.” 나무가 대답합니다.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밑동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 이리 와서 앉아 푹 쉬도록 해.” 남자는 시키는 대로 나무밑동에 걸쳐 앉았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정표가 되었다. 언젠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누군가를 알게 된다면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것이 인생에 큰 목적지가 되었다. 지금 나는 그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지만 결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사랑받아보지 못한 이가 주는 사랑이 올바르지 않아서 줄 곳 없는 마음으로 끝날지, 우연히도, 아주 우연히도 그 마음이 올바르게 자라서 그늘이 필요하고 과실이 필요하고 가지가 필요한 이에게 행복의 기초가 되어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수십 년 전 도서관에 숨어 세상에서 도망만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희망한 것처럼, 나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어준 한 그루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의 씨앗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핑계일 뿐이지만 고등학교 다니던 날에 공부에 매진하지 않았다. 하고 안 하고는 나의 선택이니 내 선택이 그랬다. 나는 언제나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도 그러했는데, 공부는 하지 않고 궁금한 것을 찾아보는 것이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한동안은 나비효과에 빠져 있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캘리포니아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는 재난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당시 이론은 무척이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비효과는 미국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이 1960년대 초에 기상 관측 중에 착안한 원리이다. 기상학자로서 날씨를 예측하기 힘든 이유를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로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 나비효과이다. 나비효과는 이후에 물리학에서 카오스 이론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고, 자료 조사는 오로지 도서관뿐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을 집처럼 드나들면서도 학업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아서 나는 대체로 머리가 참 나쁜 학생으로 여겨졌다. 남들 모두 중간고사 준비할 때 나는 나비효과나 찾고 있으니 성적이 잘 나올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 숨 쉴 수 있는 시간이었고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왕 나비효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냈으니 흔히 생각하는 오해가 한가지 있음을 설명해야겠다. 나비효과는 작은 사건이 큰일로 변화무쌍하게 번져가는 것을 설명하는 것 같지만, 작은 변화가 늘 큰 변화의 변수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이 어딘가에서는 태풍을 불러온다는 것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연관 관계를 충분히 입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비효과에 갖는 관심은 빌미였을지도 모른다.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까지 있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주제를 정하고 조사하고 기록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날은 저녁도 건너뛰는 일이 일상이었다. 배는 고프고 머리는 무거웠지만, 적어도 두려움에 떨지는 않아도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일상처럼 찾아오는 폭언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발길질에 두려움에 갇혀 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졌기에 그 시간을 피할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장소는 나에게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안식처이고 피난처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읽을 기회도 되었다. 어떤 날은 아무 코너나 가서 눈을 감고 책 한 권을 골라서 읽고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간혹 소설 코너에서 마음에 꼭 들어오는 책을 만나게 되면 그날 하루 동안은 같은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 조지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영락 생활> 이라는 책은 기억하기로 80번 이상을 읽었는데, 바닥에 떨어진 누군가의 생활을 읽으면서 나보다 더 힘든 인생에 위로받았다. 나는 당시에 조지오웰이 동물농장을 쓴 작가라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도서관은 당시 나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고 여행지였다. 한동안은 추리소설에 빠져 살았는데 당시까지 나온 추리소설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읽었던 기억이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용감한 형제 시리즈와 같이 세상 사람이 잘 모르는 작품까지 정말 탐독했다. 이 시리즈는 모험 집과 비슷했는데, 시리즈마다 유명한 해외의 새로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작품 속 도시를 묘사하는 장면에 매료되어 주인공과 함께 그 도시를 마음속에서 거닐곤 했다. 어떤 날은 얼마나 심취했는지 읽던 책을 놓고 싶지 않아서 화장실에 숨어서 책을 보기도 했다. 그날은 두려움보다 흥미에 빠져 행복했다.
어느날인가 두 권의 책을 손에 잡았는데 그 책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품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당시 나는 잦은 폭력에 마음이 죽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이고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매일 듣는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였으니까. 사람이 같은 말을 10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나를 욕하는 것이라면 화가 난다. 백번 정도 들으면 나에게 혹시 문제가 있나 생각해보게 된다. 만 번 정도 들으면 그 말이 곧 내가 된다. 나는 십만 번 정도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부모님 두 사람 불화의 원인이고 씨앗이고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로 사는 운명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믿었다.
"You'll be a beautiful butterfly - we’re all waiting for you!"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 모두가 너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꽃들에게 희망을> 작품에서 아직도 생각나는 문장인데, 나는 저 문장을 읽고 참 오랫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주 조금의 기억을 되돌려 생각해보면 애벌레로 살다 밟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희망을 태어나서 처음 하게 되었다. 그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고, 만 번을 들은 말을 다시 한번 더 듣는 날에는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도 있고 애벌레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에서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보이는 곳마다 메모를 써서 붙여 놓고 잠들기 전에는 같은 문장을 계속 되새기면서 잠들곤 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죽지 말고 살아서 어른이 되자는 아주 사소하고 소박하고 목표라고도 할 수 없는 목적지였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적어도 아픈 말로 난도질하지 않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생겼다. 돌아보면 나는 사랑받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받지 못한 것을 제대로 줄 수 있을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른이 되어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를 내려 놓지는 않았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무는 결국 그루터기만 남는다. 그늘이 되어주고 열매 맺어 과실을 주고 가지도 모두 주고 나중에는 밑동만 남게 되지만, 사랑하는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노년이 된 아이가 왔을 때 남아 있는 그루터기에 앉아서 쉬는 마지막 장면이 사랑하는 감정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나에게는 정말 큰 사랑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 무엇이든 너에게 주고 싶은데. 내게 남은 것이라곤 늙어빠진 나무 밑동뿐이야. 미안해.” 나무가 말하자 늙은 남자는 “내게 필요한 것은 없어. 앉아 쉴 자리만 있으면 좋겠어.” 나무가 대답합니다. “앉아 쉬기에는 늙은 나무밑동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 이리 와서 앉아 푹 쉬도록 해.” 남자는 시키는 대로 나무밑동에 걸쳐 앉았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이정표가 되었다. 언젠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누군가를 알게 된다면 바라는 것 없이 주는 것이 인생에 큰 목적지가 되었다. 지금 나는 그 길을 선택해서 걷고 있지만 결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사랑받아보지 못한 이가 주는 사랑이 올바르지 않아서 줄 곳 없는 마음으로 끝날지, 우연히도, 아주 우연히도 그 마음이 올바르게 자라서 그늘이 필요하고 과실이 필요하고 가지가 필요한 이에게 행복의 기초가 되어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수십 년 전 도서관에 숨어 세상에서 도망만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희망한 것처럼, 나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어준 한 그루 나무처럼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의 씨앗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2025-07-07 (No.63)
가을비
꺼질 것 같지 않은 여름이 저물어간다. 8월의 달력을 넘기고 찾아온 9월은 비와 함께 시작한다. 어둑한 밤거리에 작은 빗소리가 골목마다 스며든다. 나는 밤거리 빗줄기 사이로 도시 불빛을 머금은 그 작은 물방울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길을 걷는다. 그렇게 뜨거웠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여름이었지만, 9월 밤 작은 빗줄기에 긴 여름이 씻겨나가는 모습에 마음 아련해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아쉬운 마음인지, 아직은 가을 스산함을 맞을 준비 안 된 마음이 서둘러 가을 외투를 찾아 입으려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9월 밤의 비는 여름 소나기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후련하게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 20대 어느날 명동 거리를 우산 없이 걷다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 일이 있다. 어느 가게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다 비속에 한없이 피어오르는 거리의 흙내음에 취해서 있는 힘껏 비를 온몸으로 받았다. 온몸이 여름 소나기에 젖어 들고 신발 가득 소낙비가 출렁이기 시작하자 비 맞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고작해야 젖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조금 전까지 비 피할 곳만 찾아 허겁지겁 뛰어다닌 나 자신이 낯설어졌다. 조금 맞을 때는 몰랐지만 다 맞아 흠뻑 젖고 나니 비는 피해야 할 고통이라기보다는 그속에서 즐겨야 할 축제 같은 것이었다.
9월의 비를 바라보며 나는 30년 전 그 순간이 기억나서 펼쳐둔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지 않기에 조용히 천천히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집으로 향하는 이 길에 맞는 비로는 신발 가득 빗물 찰랑거릴 일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세찬 바람에 우산살이 부러질까 염려하며 우산을 꼭 붙들고 있던 두려운 마음은 우산을 접고 젖으라며 내리는 비의 뜻 그대로 젖어 들며 맞이하니 조금씩 사라졌다. 9월의 비가 머리에 스미고 뺨을 따라 슬며시 흘러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는 비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었다.
비에 젖지 않으려 우산만 바라보며 바람과 맞서던 시간이 지나가자 걷는 도시의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이 빗물과 섞이며 천천히 흘러내리는 곳곳의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도시 불빛과 빗물의 향연은 한순간 머물다 사라지곤 하는데 특히 유리창에 비치는 물빛의 반영은 예술이다. 조명의 색이 빗물에 섞여 새로운 색으로 반짝이는 중에 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잠시 빛을 더해주면 화려함은 그 정점에 이른다. 나는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그 빛의 공연을 한없이 바라보다 어느덧 자정에 이르러 도시의 빛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고서야 다시 걷기 시작했다.
9월의 비는 여름 소낙비와 또 다른 점이 있다. 처음 젖어 들 때는 몰랐지만 빗물이 스민 자리에 바람이 스치니 작은 가시 같은 차가움이 바람 든 자리에 머문다. 가을비를 맞아본 것은 수십 년 반복한 일이었지만, 기억력이 나쁜 나는 매년 가을비의 이 스산한 차가움을 잊곤 한다. 어제까지 뜨거웠던 낮의 열기에 적응된 몸은 9월 비와 바람의 차가움에 가끔 소스라치듯 움츠러들었다. 인적이 줄어들고 오가는 차도 보이지 않는 이 시간에 차를 불러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젖은 옷으로 차에 오르면 그다음 손님에게도 기사에게도 폐가 될 거라는 생각에 끝까지 걷기로 했다.
그래도 몸에 든 한기를 떨쳐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아까 걷다 지나쳐온 편의점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다행히 9월이 시작돼서인지 따뜻한 꿀차 한잔을 구할 수 있었다. 양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병을 잡고 잠시동안 한기를 녹여본다. 멀쩡한 우산을 들고 온몸이 젖어 있는 나를 바라보는 점원의 이상한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편의점을 나섰다. 왜 이 지경까지 비를 맞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하여, 내일의 나에게도, 밤사이 일해야 하는 편의점 점원에게도 미안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꿀차는 잠시 동안 따뜻했다. 몸의 한기를 씻어내려 서둘러 마셔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 다행인 것은 그사이 바람이 잦아들었다. 비는 여전히 흩날리며 내렸지만 바람이 멈춘 거리에 더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스산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고 있던 우산을 원래 접혀 있던 선을 따라 한겹 한겹씩 접으면서 걸었다. 생각해보니 이보다 비가 세차게 내리면 다시 우산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조차 지워버리고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으리라는 마음으로 우산을 접는 동안 마음은 더욱 고요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러는 동안 거리에도 작은 물웅덩이가 하나둘 피어나 있었다. 온 사방에 밤이 짙게 내린 시간 거리 물웅덩이는 작은 꽃처럼 빛난다. 빗물에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그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 꽃에 물어보았다.
“왜 여름은 그렇게 빨리 사라져 버린 거지?”
대답할 리 없는 그 질문은 밤거리를 조용히 맴돌다가 사라졌다.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고 거리에 떨어지는 소리도 점점 커지면서 나의 질문을 삼켜버렸다. 나는 그 빗소리에 파묻혀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힘들고 길었던 여름이었는데, 나는 지금 아쉬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계절이 바뀐다는 건 나에게 항상 불안감을 주었기에 그 불안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바람 같은 질문이었으리라. 태양 아래 빛나던 그 풀잎과, 먼 길 찾아가 갈증을 달래주었던 카페에서 느낀 청량함, 어느 해안 도시에서 맛보았던 여름의 행복한 맛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었나 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조용히 배란다로 나가서 내리는 비를 좀더 지켜보았다. 물방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흐릿했고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 밤에도 꺼지지 않고 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 하나가 여전히 머무는 모습에 안도했다. 그 빛는 차가운 비 속에 홀로 서 있는 듯 보였지만, 꺼지지 않고 지켜낼 것이 있다는 듯 반짝였고, 그 모습에 위로 받았다.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바깥 바람은 조금씩 더 차가워지겠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가을 너머 찾아올 겨울, 그 뒤에 다시 올 봄이 있다는 것을 기억력 좋지 않은 나임에도 잊지 않으려 한다. 지난 봄과 여름처럼 가을과 겨울 동안 따뜻한 추억으로 채워둔다면 넉넉하게 추운 시절을 지내고 기쁜 봄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리를 비에 젖어들 것을 각오하고 맞이한 나에게 찾아온 평안처럼, 가을과 겨울도 그렇게 맞이해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가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은 온전히 내 마음이 만들어오는 것을 알기에 젖어드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흘러가게 두려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지나가고 나면 다시 한번 아름다운 봄이, 맑은 빛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을 알기에 이 가을 내리는 비에 더는 움츠러들지 않으려 한다. 너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가을비
꺼질 것 같지 않은 여름이 저물어간다. 8월의 달력을 넘기고 찾아온 9월은 비와 함께 시작한다. 어둑한 밤거리에 작은 빗소리가 골목마다 스며든다. 나는 밤거리 빗줄기 사이로 도시 불빛을 머금은 그 작은 물방울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길을 걷는다. 그렇게 뜨거웠고 그래서 고통스러운 여름이었지만, 9월 밤 작은 빗줄기에 긴 여름이 씻겨나가는 모습에 마음 아련해진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아쉬운 마음인지, 아직은 가을 스산함을 맞을 준비 안 된 마음이 서둘러 가을 외투를 찾아 입으려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9월 밤의 비는 여름 소나기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후련하게 쏟아져 내리지 않는다. 20대 어느날 명동 거리를 우산 없이 걷다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 일이 있다. 어느 가게 천막 밑에서 비를 피하다 비속에 한없이 피어오르는 거리의 흙내음에 취해서 있는 힘껏 비를 온몸으로 받았다. 온몸이 여름 소나기에 젖어 들고 신발 가득 소낙비가 출렁이기 시작하자 비 맞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졌다. 생각해보니 고작해야 젖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조금 전까지 비 피할 곳만 찾아 허겁지겁 뛰어다닌 나 자신이 낯설어졌다. 조금 맞을 때는 몰랐지만 다 맞아 흠뻑 젖고 나니 비는 피해야 할 고통이라기보다는 그속에서 즐겨야 할 축제 같은 것이었다.
9월의 비를 바라보며 나는 30년 전 그 순간이 기억나서 펼쳐둔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지지 않기에 조용히 천천히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집으로 향하는 이 길에 맞는 비로는 신발 가득 빗물 찰랑거릴 일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세찬 바람에 우산살이 부러질까 염려하며 우산을 꼭 붙들고 있던 두려운 마음은 우산을 접고 젖으라며 내리는 비의 뜻 그대로 젖어 들며 맞이하니 조금씩 사라졌다. 9월의 비가 머리에 스미고 뺨을 따라 슬며시 흘러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는 비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었다.
비에 젖지 않으려 우산만 바라보며 바람과 맞서던 시간이 지나가자 걷는 도시의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이 빗물과 섞이며 천천히 흘러내리는 곳곳의 공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도시 불빛과 빗물의 향연은 한순간 머물다 사라지곤 하는데 특히 유리창에 비치는 물빛의 반영은 예술이다. 조명의 색이 빗물에 섞여 새로운 색으로 반짝이는 중에 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잠시 빛을 더해주면 화려함은 그 정점에 이른다. 나는 젖어 드는 줄도 모르고, 그 빛의 공연을 한없이 바라보다 어느덧 자정에 이르러 도시의 빛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고서야 다시 걷기 시작했다.
9월의 비는 여름 소낙비와 또 다른 점이 있다. 처음 젖어 들 때는 몰랐지만 빗물이 스민 자리에 바람이 스치니 작은 가시 같은 차가움이 바람 든 자리에 머문다. 가을비를 맞아본 것은 수십 년 반복한 일이었지만, 기억력이 나쁜 나는 매년 가을비의 이 스산한 차가움을 잊곤 한다. 어제까지 뜨거웠던 낮의 열기에 적응된 몸은 9월 비와 바람의 차가움에 가끔 소스라치듯 움츠러들었다. 인적이 줄어들고 오가는 차도 보이지 않는 이 시간에 차를 불러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젖은 옷으로 차에 오르면 그다음 손님에게도 기사에게도 폐가 될 거라는 생각에 끝까지 걷기로 했다.
그래도 몸에 든 한기를 떨쳐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아까 걷다 지나쳐온 편의점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다행히 9월이 시작돼서인지 따뜻한 꿀차 한잔을 구할 수 있었다. 양손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병을 잡고 잠시동안 한기를 녹여본다. 멀쩡한 우산을 들고 온몸이 젖어 있는 나를 바라보는 점원의 이상한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편의점을 나섰다. 왜 이 지경까지 비를 맞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하여, 내일의 나에게도, 밤사이 일해야 하는 편의점 점원에게도 미안한 일이 될 것 같았다.
꿀차는 잠시 동안 따뜻했다. 몸의 한기를 씻어내려 서둘러 마셔버린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 다행인 것은 그사이 바람이 잦아들었다. 비는 여전히 흩날리며 내렸지만 바람이 멈춘 거리에 더는 그렇게 견디기 힘든 스산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고 있던 우산을 원래 접혀 있던 선을 따라 한겹 한겹씩 접으면서 걸었다. 생각해보니 이보다 비가 세차게 내리면 다시 우산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조차 지워버리고 내리는 비를 온전히 맞으리라는 마음으로 우산을 접는 동안 마음은 더욱 고요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러는 동안 거리에도 작은 물웅덩이가 하나둘 피어나 있었다. 온 사방에 밤이 짙게 내린 시간 거리 물웅덩이는 작은 꽃처럼 빛난다. 빗물에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그 모습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 꽃에 물어보았다.
“왜 여름은 그렇게 빨리 사라져 버린 거지?”
대답할 리 없는 그 질문은 밤거리를 조용히 맴돌다가 사라졌다.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고 거리에 떨어지는 소리도 점점 커지면서 나의 질문을 삼켜버렸다. 나는 그 빗소리에 파묻혀 조용히 생각에 빠졌다. 그렇게 힘들고 길었던 여름이었는데, 나는 지금 아쉬워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계절이 바뀐다는 건 나에게 항상 불안감을 주었기에 그 불안을 맞이하고 싶지 않은 바람 같은 질문이었으리라. 태양 아래 빛나던 그 풀잎과, 먼 길 찾아가 갈증을 달래주었던 카페에서 느낀 청량함, 어느 해안 도시에서 맛보았던 여름의 행복한 맛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었나 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조용히 배란다로 나가서 내리는 비를 좀더 지켜보았다. 물방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흐릿했고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 밤에도 꺼지지 않고 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 하나가 여전히 머무는 모습에 안도했다. 그 빛는 차가운 비 속에 홀로 서 있는 듯 보였지만, 꺼지지 않고 지켜낼 것이 있다는 듯 반짝였고, 그 모습에 위로 받았다.
여름은 지나가고 가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바깥 바람은 조금씩 더 차가워지겠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가을 너머 찾아올 겨울, 그 뒤에 다시 올 봄이 있다는 것을 기억력 좋지 않은 나임에도 잊지 않으려 한다. 지난 봄과 여름처럼 가을과 겨울 동안 따뜻한 추억으로 채워둔다면 넉넉하게 추운 시절을 지내고 기쁜 봄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리를 비에 젖어들 것을 각오하고 맞이한 나에게 찾아온 평안처럼, 가을과 겨울도 그렇게 맞이해보려 한다. 계절의 변화가 두려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은 온전히 내 마음이 만들어오는 것을 알기에 젖어드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흘러가게 두려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지나가고 나면 다시 한번 아름다운 봄이, 맑은 빛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을 알기에 이 가을 내리는 비에 더는 움츠러들지 않으려 한다. 너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2024-12-15 (No.62)
작은 빛
빛이라는 존재는 참 신비롭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빛은 가장 빠른 이동속도를 가진 물질이다. 1초에 약 30만Km를 이동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떤 물체나 사람이 발명한 이동수단도 이 속도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과학적 상식이다. 이렇게 대단한 물질이지만, 일상에서 누구나 흔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빛의 흥미로움 때문인지 문학 작품에 다양한 장치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세상을 탐구하는 학자 세 명이 세상을 바꿀 징조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에서는 세 명의 탐구자가 새벽하늘 강렬한 별빛을 따라서 인류 역사를 바꿀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검색창에서 ‘베들레헴의 별’ 참조
. 보통의 이야기라면 여기에서 끝났겠지만, 그 작품은 한 걸음 더 깊은 상상을 추가했다. 세 명의 학자에게 가이드가 되어준 별빛이 되어 준 먼 행성의 이야기를 상상 속에 더해서 그려냈는데, 그 별은 중력의 영향으로 폭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의 모든 사람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이런 허망한 죽음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별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중요한 존재를 발견하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그 별의 누구도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별의 폭발과 그 파괴의 빛이 다른 세상 어딘가에서는 세상을 지켜주는 빛이 될 것이라 상상했던 이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죽음의 증거가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빛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서사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된 수십만 광년이라는 우주의 광대함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에 빠져들었다. 고통 속에 흘린 내 눈물 한 방울이 증발하여 구름에 더해지면서 첫 번째 빗방울을 만들어, 단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눈물 흘릴 때마다 앞서 빛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하곤 했다.
빛에 관하여 가장 아끼는 이야기는 채움에 관한 것이다. 우화 속 이야기에서 삼 형제는 각각 자신의 지혜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삼 형제에게 주어진 과제는, 약간의 금전으로 큰 방을 가득 채울 것을 사 오라는 것이었다. 삼 형제 중 한 사람은 주어진 돈으로는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는 포기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른 이는 가진 돈으로 가장 저렴한 솜을 샀는데 방을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사 온 것은 양초와 성냥 한 자루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보다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 선택을 비웃었지만, 밤이 되어 깜깜해진 시간에 양초에 불을 붙여서 온 방을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보고, 그의 지혜에 감탄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야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밤이 오길 기다린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자기 뜻을 보이기 위해서 조롱받을 것도 감수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릴 줄 아는 그 마음과, 과제의 속뜻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지혜롭게 풀어낸 방식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평소 조급한 성격인 나로서는 그와 같은 기다림의 미학이 담긴 해법은 생각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말 그대로 감탄이 나왔다.
빛은 그래서 참 신비로운 존재이다. 세상 어떤 물체보다 빠르면서 그 어떤 물질보다 가볍고 공간을 가득 채울 수도 있다. 빛이 있어야 세상 모든 사물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빛 일부를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빛은 세상 모든 사물의 코디네이터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렇게 빛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명에도 흥미가 깊다. 한동안 유명한 조명기구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간혹 해외에 나갈 일이 있을 때면 실내 장식 중에서도 조명을 가장 유심히 보게 된다. 어둠 속에서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빛이기 때문에, 나는 어둠 속에서 조명이 공간을 채우거나 곳곳에 스며드는 모습에서 안식과 위안을 얻곤 한다.
요즘에는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방식도 다양해졌는데 방 전체를 밝히는 방 등에서부터, 부분 조명, 가구나 공간 뒤로 숨기는 매립형 조명 등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많아서 조명 애호가로서는 감사한 마음이다. 얼마 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부분 조명을 업그레이드하러 매장에 갔다가 리모컨으로 조명의 밝기와 색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을 구입 했다. 가족의 방에 이미 있는 제품의 새로운 버전이었는데, 마치 가스등처럼 어렴풋한 빛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피어오르듯이 보이는 순간이 참 아름답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희고 밝은 등보다 작은 빛으로 방을 조용히 채우는 순간에 아이 눈이 반짝 빛나는 모습이 좋다.
그런저런 이유로 구입한 조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뜻한 대로 동작하지를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켜고 끄는 것은 되지만, 밝기를 조절하는 기능이 동작하지 않아서 불량인 제품을 구했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며칠을 켜고 끄는 것만 해보다가 그것뿐이라면 조명 스위치로 하는 것이 더 간단해서 조명 리모컨을 치워놓고 잊고 있었다.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명 끄는 버튼을 꾹 눌러보았다. 원래 사용하던 제품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밝기가 낮아지는 형식이었는데, 신형은 길게 누르면 밝기가 낮아지는 형식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일상의 수많은 생각에 쫓겨 지내다 보니 이 단순한 변화도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하고 단지 잘못된 물건을 만났다는 부정적인 결론을 먼저 내려버린 것에 스스로 당황하기도 했다. 마음 여유를 잃다 보니 조명 리모컨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볼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결론 내려 버린 것이다. 천천히 주변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 제품보다 더 다양하게 밝기를 조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곤 나만의 최적의 밝기를 맞추고는 잠시 기쁜 마음에 안도했다. 아늑하다는 느낌, 빛이 마치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빛 속에서 떨어져 지내고 있는 가족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문득 조명 리모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조급함에 저지르는 실수를 나에게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는 세상의 지적에 나를 맞추려 노력하면서, 규격 밖으로 벗어나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잘못된 나를 자책하곤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다. 역할과 쓰임이 다를 뿐 망가지거나 잘못된 것은 아님에도 자책만 해온 날들이었지 않나 싶다. 만약 지금 어딘가에 아픈 누군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는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삶의 방식이 조금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망가지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충분히 존중받고 존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양초 하나 성냥 하나 챙겨두면 좋겠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서로의 양초와 성냥이 되어줄 수 있을테니.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채워지면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지 각자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가장 어두운 순간 의지가 되는 빛은 아주 조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 않아도 어떠한가, 양초처럼 작은 빛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충만하게 삶을 채울 수 있을테니.
작은 빛
빛이라는 존재는 참 신비롭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빛은 가장 빠른 이동속도를 가진 물질이다. 1초에 약 30만Km를 이동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떤 물체나 사람이 발명한 이동수단도 이 속도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과학적 상식이다. 이렇게 대단한 물질이지만, 일상에서 누구나 흔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빛의 흥미로움 때문인지 문학 작품에 다양한 장치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세상을 탐구하는 학자 세 명이 세상을 바꿀 징조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였는데, 그 이야기에서는 세 명의 탐구자가 새벽하늘 강렬한 별빛을 따라서 인류 역사를 바꿀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검색창에서 ‘베들레헴의 별’ 참조
. 보통의 이야기라면 여기에서 끝났겠지만, 그 작품은 한 걸음 더 깊은 상상을 추가했다. 세 명의 학자에게 가이드가 되어준 별빛이 되어 준 먼 행성의 이야기를 상상 속에 더해서 그려냈는데, 그 별은 중력의 영향으로 폭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의 모든 사람은 생각했다. 자신들의 이런 허망한 죽음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별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중요한 존재를 발견하게 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그 별의 누구도 자신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별의 폭발과 그 파괴의 빛이 다른 세상 어딘가에서는 세상을 지켜주는 빛이 될 것이라 상상했던 이는 없었다. 나는 한동안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죽음의 증거가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빛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서사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된 수십만 광년이라는 우주의 광대함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에 빠져들었다. 고통 속에 흘린 내 눈물 한 방울이 증발하여 구름에 더해지면서 첫 번째 빗방울을 만들어, 단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눈물 흘릴 때마다 앞서 빛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하곤 했다.
빛에 관하여 가장 아끼는 이야기는 채움에 관한 것이다. 우화 속 이야기에서 삼 형제는 각각 자신의 지혜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삼 형제에게 주어진 과제는, 약간의 금전으로 큰 방을 가득 채울 것을 사 오라는 것이었다. 삼 형제 중 한 사람은 주어진 돈으로는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는 포기한 얼굴로 돌아왔다. 다른 이는 가진 돈으로 가장 저렴한 솜을 샀는데 방을 가득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사 온 것은 양초와 성냥 한 자루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보다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 선택을 비웃었지만, 밤이 되어 깜깜해진 시간에 양초에 불을 붙여서 온 방을 빛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보고, 그의 지혜에 감탄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야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밤이 오길 기다린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자기 뜻을 보이기 위해서 조롱받을 것도 감수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릴 줄 아는 그 마음과, 과제의 속뜻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지혜롭게 풀어낸 방식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평소 조급한 성격인 나로서는 그와 같은 기다림의 미학이 담긴 해법은 생각해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말 그대로 감탄이 나왔다.
빛은 그래서 참 신비로운 존재이다. 세상 어떤 물체보다 빠르면서 그 어떤 물질보다 가볍고 공간을 가득 채울 수도 있다. 빛이 있어야 세상 모든 사물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빛 일부를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빛은 세상 모든 사물의 코디네이터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렇게 빛에 관심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명에도 흥미가 깊다. 한동안 유명한 조명기구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간혹 해외에 나갈 일이 있을 때면 실내 장식 중에서도 조명을 가장 유심히 보게 된다. 어둠 속에서 공간을 완성하는 것은 언제나 빛이기 때문에, 나는 어둠 속에서 조명이 공간을 채우거나 곳곳에 스며드는 모습에서 안식과 위안을 얻곤 한다.
요즘에는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방식도 다양해졌는데 방 전체를 밝히는 방 등에서부터, 부분 조명, 가구나 공간 뒤로 숨기는 매립형 조명 등 선택할 수 있는 종류가 많아서 조명 애호가로서는 감사한 마음이다. 얼마 전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부분 조명을 업그레이드하러 매장에 갔다가 리모컨으로 조명의 밝기와 색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을 구입 했다. 가족의 방에 이미 있는 제품의 새로운 버전이었는데, 마치 가스등처럼 어렴풋한 빛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 피어오르듯이 보이는 순간이 참 아름답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희고 밝은 등보다 작은 빛으로 방을 조용히 채우는 순간에 아이 눈이 반짝 빛나는 모습이 좋다.
그런저런 이유로 구입한 조명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뜻한 대로 동작하지를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켜고 끄는 것은 되지만, 밝기를 조절하는 기능이 동작하지 않아서 불량인 제품을 구했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며칠을 켜고 끄는 것만 해보다가 그것뿐이라면 조명 스위치로 하는 것이 더 간단해서 조명 리모컨을 치워놓고 잊고 있었다.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명 끄는 버튼을 꾹 눌러보았다. 원래 사용하던 제품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밝기가 낮아지는 형식이었는데, 신형은 길게 누르면 밝기가 낮아지는 형식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알았다.
일상의 수많은 생각에 쫓겨 지내다 보니 이 단순한 변화도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하고 단지 잘못된 물건을 만났다는 부정적인 결론을 먼저 내려버린 것에 스스로 당황하기도 했다. 마음 여유를 잃다 보니 조명 리모컨에 들어 있는 설명서를 찬찬히 읽어볼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결론 내려 버린 것이다. 천천히 주변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예전 제품보다 더 다양하게 밝기를 조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곤 나만의 최적의 밝기를 맞추고는 잠시 기쁜 마음에 안도했다. 아늑하다는 느낌, 빛이 마치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빛 속에서 떨어져 지내고 있는 가족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문득 조명 리모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조급함에 저지르는 실수를 나에게도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는 세상의 지적에 나를 맞추려 노력하면서, 규격 밖으로 벗어나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잘못된 나를 자책하곤 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일 뿐인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다. 역할과 쓰임이 다를 뿐 망가지거나 잘못된 것은 아님에도 자책만 해온 날들이었지 않나 싶다. 만약 지금 어딘가에 아픈 누군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는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삶의 방식이 조금 다른 것이라는 점을. 망가지거나 잘못된 것이 아닌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충분히 존중받고 존중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양초 하나 성냥 하나 챙겨두면 좋겠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서로의 양초와 성냥이 되어줄 수 있을테니.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채워지면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지 각자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가장 어두운 순간 의지가 되는 빛은 아주 조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지 않아도 어떠한가, 양초처럼 작은 빛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고 충만하게 삶을 채울 수 있을테니.
2024-12-15 (No.61)
숨 쉴 곳
전복의 식감을 좋아한다. 맛있게 먹기만 할 뿐, 전복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탁에 주로 오르는 종류는 아마도 참전복일 것이다. 참전복은 조림으로도 적당한 식감이고 회로 먹어도 쫄깃한 맛이 전복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불호가 적은 종이라,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참전복에 속한다. 수산시장에 가면 비교적 크기가 큰 종류도 있는데 말전복일 가능성이 크다. 말전복은 육질이 부드러운 편이라서 회 보다는 구이용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이용이건 회건 전복이면 가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전복의 식감을 좋아하지만 그리 자주 접하지는 못하는데, 한국은 양식함에도 전복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전복의 가격이 높은 이유는 단순한데, 어지간한 성채 크기를 맛보기 위해서는 양식 전복의 경우에도 거의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가끔 시장에 나오는 자연산 전복은 맛볼 기회가 좀처럼 없는 편이다. 자연산 전복의 경우에는 식탁에 오르기까지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치는데 식탁에 올리기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노고가 큰 분은 역시나 해녀분이다. 깊이 잠수할수록 더 크고 좋은 전복을 얻을 수 있으므로 해녀의 숨참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상품 자연산 전복은 kg당 수십만 원을 넘어서는데, 그런 전복은 깊은 바닷속에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평소 숨참기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전복회를 먹다 해녀의 숨참기에 관심이 이르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숨을 참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폐활량이 3에서 4ℓ 정도이다. 이 정도 폐활량으로 숨참기를 하면 50여 초, 좀 더 참아낸다면 1분 내외 정도를 참아낼 수 있다. 글을 쓰면서 숨참기를 해봤지만 30초부터 머리가 띵해져서 참아보기를 포기했다. 혹시나 뇌로 가는 산소가 적어져서 글쓰기에 오탈자가 늘어나면 스스로 슬플 것 같아서라는 변명을 스스로 되뇌면서.
평균적인 성인이 1분 내외 숨참기를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기네스에 기록된 숨참기 기록은 24분 33초이다. 처음 기록을 보면서 2분 33초에 오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공식적으로 세계 기록은 24분 33초가 맞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숨을 참아낼 수 있을까가 궁금한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에 먼저 생각이 번졌다. 숨참기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부디미르 쇼바트는 크로아티아 프리다이버이다. 그에게는 사샤라는 딸이 있는데, 뇌성마비와 자폐증, 그리고 뇌전증을 앓고 있는 딸이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좌절할 법한 상황에서도 의지를 놓치지 않은 부성애를 가진 그의 모습에 경외감이 들었다.
쇼바트의 여러 인터뷰를 보다 보니 숨참기를 위한 최고의 비법은 숨 잘 쉬는 법을 아는 것이었다. 평소 깊고 천천히 호흡하면서 호흡의 깊이를 높이는 숨 잘 쉬는 연습이 숨참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비법이라고 하니, 조금 전 무작정 숨참기를 해본 나 자신의 무지에 머리가 띵해 온다.
무언가를 참아내면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해녀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바닷속으로 잠수할 일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늘 무언가를 참아내는 일의 연속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의 일상을 인내하며 주어진 목표로 글자 한 자 한자씩, 숫자 하나씩 짚어가며 참아내는 상황의 연속이 평범한 일상이 아닌가? 어떤 날은 참아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호흡이 무거워지기도, 아니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참아내고 저 끝이 안 보이는 깊이를 들어가서 무사히 올라올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 일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토스 창업자는 성공에 대해서 사업 성공은 99% 운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운에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운을 만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일상적인 작은 성공도, 큰 사업의 성공도 그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어 내는 과정은 전복을 따러 잠수하는 해녀의 숨참기나, 밝게 생활하는 딸을 응원하는 쇼바트의 숨참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숨참기를 위해서는 숨 잘 쉬는 법을 연습하고 필요할 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무거운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깊은 한숨이 아닌,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이 필요하다.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 침대 위 공간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일 수도 있고, 새로운 도전과 배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형태와 방법에 관계없이 편히 숨 쉴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내가 편히 숨 쉬고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는 알겠지만, 의식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아주 명확한 방법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과정, 사람, 장소와 함께할 때 그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면 그 사람과의 시간은 충분히 즐거운 숨 쉴 수 있는 시간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숨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각자는 인생 목적과 가치에 두는 의미가 다르니 토스 대표의 말처럼 운이 찾아올 때까지 인내하여 인내의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자는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인내해야 할 몫이 있으니, 숨참기를 잘하기 위해서 나만의 숨 쉴 곳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 장소, 누군가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일상을 조금은 덜 무겁게 견뎌내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신은 편안한 숨을 쉬고 있으신가요”
숨 쉴 곳
전복의 식감을 좋아한다. 맛있게 먹기만 할 뿐, 전복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식탁에 주로 오르는 종류는 아마도 참전복일 것이다. 참전복은 조림으로도 적당한 식감이고 회로 먹어도 쫄깃한 맛이 전복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불호가 적은 종이라,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참전복에 속한다. 수산시장에 가면 비교적 크기가 큰 종류도 있는데 말전복일 가능성이 크다. 말전복은 육질이 부드러운 편이라서 회 보다는 구이용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이용이건 회건 전복이면 가리지 않고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전복의 식감을 좋아하지만 그리 자주 접하지는 못하는데, 한국은 양식함에도 전복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전복의 가격이 높은 이유는 단순한데, 어지간한 성채 크기를 맛보기 위해서는 양식 전복의 경우에도 거의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가끔 시장에 나오는 자연산 전복은 맛볼 기회가 좀처럼 없는 편이다. 자연산 전복의 경우에는 식탁에 오르기까지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치는데 식탁에 올리기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노고가 큰 분은 역시나 해녀분이다. 깊이 잠수할수록 더 크고 좋은 전복을 얻을 수 있으므로 해녀의 숨참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상품 자연산 전복은 kg당 수십만 원을 넘어서는데, 그런 전복은 깊은 바닷속에 있기 때문이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평소 숨참기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전복회를 먹다 해녀의 숨참기에 관심이 이르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숨을 참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일반적인 성인이라면 폐활량이 3에서 4ℓ 정도이다. 이 정도 폐활량으로 숨참기를 하면 50여 초, 좀 더 참아낸다면 1분 내외 정도를 참아낼 수 있다. 글을 쓰면서 숨참기를 해봤지만 30초부터 머리가 띵해져서 참아보기를 포기했다. 혹시나 뇌로 가는 산소가 적어져서 글쓰기에 오탈자가 늘어나면 스스로 슬플 것 같아서라는 변명을 스스로 되뇌면서.
평균적인 성인이 1분 내외 숨참기를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기네스에 기록된 숨참기 기록은 24분 33초이다. 처음 기록을 보면서 2분 33초에 오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러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공식적으로 세계 기록은 24분 33초가 맞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숨을 참아낼 수 있을까가 궁금한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에 먼저 생각이 번졌다. 숨참기 세계신기록 보유자인 부디미르 쇼바트는 크로아티아 프리다이버이다. 그에게는 사샤라는 딸이 있는데, 뇌성마비와 자폐증, 그리고 뇌전증을 앓고 있는 딸이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힘을 얻었다고 한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좌절할 법한 상황에서도 의지를 놓치지 않은 부성애를 가진 그의 모습에 경외감이 들었다.
쇼바트의 여러 인터뷰를 보다 보니 숨참기를 위한 최고의 비법은 숨 잘 쉬는 법을 아는 것이었다. 평소 깊고 천천히 호흡하면서 호흡의 깊이를 높이는 숨 잘 쉬는 연습이 숨참기를 위해 가장 중요한 비법이라고 하니, 조금 전 무작정 숨참기를 해본 나 자신의 무지에 머리가 띵해 온다.
무언가를 참아내면서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해녀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바닷속으로 잠수할 일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늘 무언가를 참아내는 일의 연속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의 일상을 인내하며 주어진 목표로 글자 한 자 한자씩, 숫자 하나씩 짚어가며 참아내는 상황의 연속이 평범한 일상이 아닌가? 어떤 날은 참아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워 호흡이 무거워지기도, 아니 무서워지기도 한다.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참아내고 저 끝이 안 보이는 깊이를 들어가서 무사히 올라올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것이 우리 일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토스 창업자는 성공에 대해서 사업 성공은 99% 운에 의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운에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운을 만날 때까지 인내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일상적인 작은 성공도, 큰 사업의 성공도 그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어 내는 과정은 전복을 따러 잠수하는 해녀의 숨참기나, 밝게 생활하는 딸을 응원하는 쇼바트의 숨참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숨참기를 위해서는 숨 잘 쉬는 법을 연습하고 필요할 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적으로 무거운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깊은 한숨이 아닌, 아무 생각하지 않아도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이 필요하다.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 침대 위 공간이 될 수도 있고,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과 보내는 시간일 수도 있고, 새로운 도전과 배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형태와 방법에 관계없이 편히 숨 쉴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좋지 않을까 싶다. 내가 편히 숨 쉬고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는 알겠지만, 의식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아주 명확한 방법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과정, 사람, 장소와 함께할 때 그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할 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면 그 사람과의 시간은 충분히 즐거운 숨 쉴 수 있는 시간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숨 쉴 곳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각자는 인생 목적과 가치에 두는 의미가 다르니 토스 대표의 말처럼 운이 찾아올 때까지 인내하여 인내의 아름다운 열매를 누리자는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인내해야 할 몫이 있으니, 숨참기를 잘하기 위해서 나만의 숨 쉴 곳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 장소, 누군가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일상을 조금은 덜 무겁게 견뎌내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신은 편안한 숨을 쉬고 있으신가요”
2024-12-15 (No.60)
그리움이 저무는 자리
적당히 걷기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가파른 길을 오르는 숨가쁨에서 성취감을 찾기도 하고 커다랗고 높은 산행에서 행복을 찾기도 한다. 마을에 꽤나 잘 가꾸어진 코스모스길이 있는데, 한여름, 비 한줄기 오지 않는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그려냈는지 궁금했다. 아름다웠던 가을 풍경에는 여름 동안 손수 물을 떠서 코스모스를 지켜낸 손길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누군가의 수고스러움을 넘어서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을맞이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숙연해지곤 한다. 적당하게 조용히 걷기를 즐기는 나는, 그 풍경을 감상만 할 뿐 희생에 동참해보겠다는 용기를 감히 내지는 못했다.
너무 높고 거친 길이 보이면 걷기를 멈추고 편한 길을 찾았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언제나 힘든 여정 앞에서는 멈추어 서서 조금은 덜 힘들어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누군가는 나에게 재미 삼아 사는 인생 같다고 했다. 행복한 순간만큼이나 고난도 삶의 한 부분임에도 나는 가능하면 고난이 보이는 길은 피했고, 누구와도 깊이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하면서 살아왔다. 사람만큼이나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피부로 느끼며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이 멍든 자국 하나하나에 새겨져서 누구와도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인사 나누는 삶에 익숙해졌다. 한두 번쯤은 그런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이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급히 뒤돌아 내 갈 길을 갔다. 그 사람과의 여정이 얼마나 높고 험한 산을 만날지, 깊은 물살에 떠밀려버릴지를 알 수 없었던 나는 평소 길을 걷는 습관 그대로 험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선택을 쉽게 해버리곤 했다.
만남은 자연스럽고 운명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목적을 가진 인위적인 형태의 모든 만남이 나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한창 젊을 때 소개팅 같은 만남을 매우 싫어했다. 다가오는 인연도 경계하는 사람이, 대놓고 인연 만들 목적을 가진 자리를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대학 시절에는 사회생활 하느라 삼대삼 소개팅 같은 자리에 빈자리 채워줄 목적으로 끌려나간 일이 몇 번 있었다. 끌려나갔던 이유는 단순한데 일상의 사소한 소재로 이른바 스몰토크에 익숙했던 내가 있으면 소개팅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번은 비슷한 또래 간호사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학교 선배가 간호사 한 명을 소개받으면서 그룹으로 소개팅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1995년의 일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1년 정도 병동에서 장기 입원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간호사 생활의 고됨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간호사실의 분위기도 정형외과, 소아병동 등에 따라서 아주 다른데 소개팅에서 만난 분들은 소아병동에서 근무하는 분들이었고, 나는 입원해 있던 중에 소아병동에서 풍선 인형 만들기 자원봉사 같은 일을 하면서 소아병동이 얼마나 마음 아린 곳인지를 잘 알았기에 이야기가 쉽게 통했다.
소아병동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나본 아이 중에는 정말 예쁘고 해맑은 천사 같은 아이인데 뇌 문제로 호흡이나 음식 섭취가 어려워서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아이가 있었다. 갓난아기일 때 부모 실수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이후로 생긴 병이라 누구도 원치 않는 불행이었다. 다른 아이는 부모·형제와 함께 이동 중에 교통사고로 가족 모두를 잃고 혼자 남았던 아이인데, 그 아이만은 약간의 골절상 이외에는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다치지 않는 기적의 아이였다. 아마도 짐작하건대 그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생명을 던져서 그 아이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을 것이다. 그 외에는 그 사고를 아는 사람들은 아이의 생존을 달리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소아병동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아이는 부모에게 크게 학대받고 보호기관에 맡겨진 아이였다. 연아라는 아주 작고 여린 5살 난 소녀였는데 소아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부모를 찾지 않는 아이였다. 오랫동안 학대받은 경험 때문인지 사람 손을 피해서 치료하기 애를 먹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풍선으로 푸들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내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푸들이라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타인의 손길을 지독히 거부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입원해 있던 당시 간호사님들에게 다른 아이보다 조금 더 천천히 손을 내밀고 조용히 먼저 쓰다듬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가오는 손길에 가해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을 학대받는 아이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손길이 다가올 때마다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폭력의 흔적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가 하면, 매번 폭력을 경험할 때마다 목 졸림을 당하게 되면 추운 겨울에도 스카프 매기가 안되기도 한다. 목에 무언가 감기는 것이 있으면 폭력의 경험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그대로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기에 그렇다.
소개팅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다들 어색함에 말이 없는 공허한 공간의 어색함이 싫었던 나는 소아병동 근무의 어려움을 공감해주면서, 내가 경험한 소아병동 아이들의 일상을 이야기 나누었다. 어느 사이 무겁고 딱딱한 공기는 사라졌고, 각자의 파트너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만큼 경계가 낮아진 것을 보고, 나는 그날의 소임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너가 되어 준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후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일어섰는데, 파트너가 된 분이 많이 불쾌한 일임에도 그런 내색 없이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는 같은 방향이니 함께 일어서자는 제안을 했다.
결과적으로 토요일 오후에 시작했던 소개팅은 자리를 일어서서 내내 걷기를 하면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신촌 연대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했는데 캠퍼스를 내려오던 중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때서야 내가 이분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의 만남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내 기억에 당시에 소개팅 첫 만남에서 – 가보지는 못했지만, 클럽 같은 곳이 아닌 다음에야 – 손잡고 걷는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연대 캠퍼스를 걸어 내려와서 정문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당시에는 이동전화가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유선 전화 정도였는데, 나는 명함을 받아도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명함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분은 내 눈에 아름다운 분이었고, 여러 시간 대화를 해보니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었고, 사람 사이 관계에서 행복과 불행의 합이 제로섬이라면 행복과 불행 모두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 명함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런 나임에도 일생에 단 한 번, 보이지 않는 길을, 아니 결말이 분명한 길임을 알면서도 먼저 손 내민 일이 있다. 그 옛날 소아병동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던 것처럼,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기에 나중에 감당할 고통을 모두 감내해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적당하게 편하고, 예상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편안한 일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한 나였지만, 어떤 일은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 옛날 불러나갔던 소개팅 자리처럼,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내 소임을 다하면 멈춰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노을 지는 언덕을 보며 그리움이 저물 때까지 그 풍경을 감상할 것이다. 일생일대 한번뿐인 용기있는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하면서.
그리움이 저무는 자리
적당히 걷기를 좋아한다. 누군가는 가파른 길을 오르는 숨가쁨에서 성취감을 찾기도 하고 커다랗고 높은 산행에서 행복을 찾기도 한다. 마을에 꽤나 잘 가꾸어진 코스모스길이 있는데, 한여름, 비 한줄기 오지 않는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그려냈는지 궁금했다. 아름다웠던 가을 풍경에는 여름 동안 손수 물을 떠서 코스모스를 지켜낸 손길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누군가의 수고스러움을 넘어서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가을맞이할 때마다 마음 한편이 숙연해지곤 한다. 적당하게 조용히 걷기를 즐기는 나는, 그 풍경을 감상만 할 뿐 희생에 동참해보겠다는 용기를 감히 내지는 못했다.
너무 높고 거친 길이 보이면 걷기를 멈추고 편한 길을 찾았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언제나 힘든 여정 앞에서는 멈추어 서서 조금은 덜 힘들어 보이는 길을 선택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누군가는 나에게 재미 삼아 사는 인생 같다고 했다. 행복한 순간만큼이나 고난도 삶의 한 부분임에도 나는 가능하면 고난이 보이는 길은 피했고, 누구와도 깊이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경계하면서 살아왔다. 사람만큼이나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피부로 느끼며 알게 되었고, 그런 경험이 멍든 자국 하나하나에 새겨져서 누구와도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인사 나누는 삶에 익숙해졌다. 한두 번쯤은 그런 내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온 이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급히 뒤돌아 내 갈 길을 갔다. 그 사람과의 여정이 얼마나 높고 험한 산을 만날지, 깊은 물살에 떠밀려버릴지를 알 수 없었던 나는 평소 길을 걷는 습관 그대로 험하지 않고 아프지 않은 선택을 쉽게 해버리곤 했다.
만남은 자연스럽고 운명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르게 말한다면 목적을 가진 인위적인 형태의 모든 만남이 나에게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한창 젊을 때 소개팅 같은 만남을 매우 싫어했다. 다가오는 인연도 경계하는 사람이, 대놓고 인연 만들 목적을 가진 자리를 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대학 시절에는 사회생활 하느라 삼대삼 소개팅 같은 자리에 빈자리 채워줄 목적으로 끌려나간 일이 몇 번 있었다. 끌려나갔던 이유는 단순한데 일상의 사소한 소재로 이른바 스몰토크에 익숙했던 내가 있으면 소개팅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번은 비슷한 또래 간호사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학교 선배가 간호사 한 명을 소개받으면서 그룹으로 소개팅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1995년의 일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1년 정도 병동에서 장기 입원을 해본 경험이 있었기에 간호사 생활의 고됨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간호사실의 분위기도 정형외과, 소아병동 등에 따라서 아주 다른데 소개팅에서 만난 분들은 소아병동에서 근무하는 분들이었고, 나는 입원해 있던 중에 소아병동에서 풍선 인형 만들기 자원봉사 같은 일을 하면서 소아병동이 얼마나 마음 아린 곳인지를 잘 알았기에 이야기가 쉽게 통했다.
소아병동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나본 아이 중에는 정말 예쁘고 해맑은 천사 같은 아이인데 뇌 문제로 호흡이나 음식 섭취가 어려워서 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아이가 있었다. 갓난아기일 때 부모 실수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이후로 생긴 병이라 누구도 원치 않는 불행이었다. 다른 아이는 부모·형제와 함께 이동 중에 교통사고로 가족 모두를 잃고 혼자 남았던 아이인데, 그 아이만은 약간의 골절상 이외에는 생명에 지장이 있을 만큼 다치지 않는 기적의 아이였다. 아마도 짐작하건대 그 아이의 부모는 자신들의 생명을 던져서 그 아이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냈을 것이다. 그 외에는 그 사고를 아는 사람들은 아이의 생존을 달리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소아병동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아이는 부모에게 크게 학대받고 보호기관에 맡겨진 아이였다. 연아라는 아주 작고 여린 5살 난 소녀였는데 소아병동에 입원해 있는 아이 중에서 유일하게 부모를 찾지 않는 아이였다. 오랫동안 학대받은 경험 때문인지 사람 손을 피해서 치료하기 애를 먹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풍선으로 푸들 만들기를 좋아했는데 내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푸들이라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타인의 손길을 지독히 거부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입원해 있던 당시 간호사님들에게 다른 아이보다 조금 더 천천히 손을 내밀고 조용히 먼저 쓰다듬어주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가오는 손길에 가해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을 학대받는 아이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손길이 다가올 때마다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폭력의 흔적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가 하면, 매번 폭력을 경험할 때마다 목 졸림을 당하게 되면 추운 겨울에도 스카프 매기가 안되기도 한다. 목에 무언가 감기는 것이 있으면 폭력의 경험이 생각하려 하지 않아도 그대로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기에 그렇다.
소개팅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다들 어색함에 말이 없는 공허한 공간의 어색함이 싫었던 나는 소아병동 근무의 어려움을 공감해주면서, 내가 경험한 소아병동 아이들의 일상을 이야기 나누었다. 어느 사이 무겁고 딱딱한 공기는 사라졌고, 각자의 파트너와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만큼 경계가 낮아진 것을 보고, 나는 그날의 소임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트너가 되어 준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후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일어섰는데, 파트너가 된 분이 많이 불쾌한 일임에도 그런 내색 없이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는 같은 방향이니 함께 일어서자는 제안을 했다.
결과적으로 토요일 오후에 시작했던 소개팅은 자리를 일어서서 내내 걷기를 하면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신촌 연대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했는데 캠퍼스를 내려오던 중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때서야 내가 이분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의 만남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내 기억에 당시에 소개팅 첫 만남에서 – 가보지는 못했지만, 클럽 같은 곳이 아닌 다음에야 – 손잡고 걷는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연대 캠퍼스를 걸어 내려와서 정문에 이르렀을 때 나에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당시에는 이동전화가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유선 전화 정도였는데, 나는 명함을 받아도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명함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분은 내 눈에 아름다운 분이었고, 여러 시간 대화를 해보니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었고, 사람 사이 관계에서 행복과 불행의 합이 제로섬이라면 행복과 불행 모두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기에, 그 명함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이런 나임에도 일생에 단 한 번, 보이지 않는 길을, 아니 결말이 분명한 길임을 알면서도 먼저 손 내민 일이 있다. 그 옛날 소아병동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던 것처럼, 나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았기에 나중에 감당할 고통을 모두 감내해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적당하게 편하고, 예상할 수 있는 길을 찾아 편안한 일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한 나였지만, 어떤 일은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 옛날 불러나갔던 소개팅 자리처럼,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내 소임을 다하면 멈춰서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노을 지는 언덕을 보며 그리움이 저물 때까지 그 풍경을 감상할 것이다. 일생일대 한번뿐인 용기있는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하면서.
2024-12-15 (No.59)
담벼락
오래전 살던 집은 막다른 골목길에 있었습니다. 담벼락으로 막혀 있는 그 골목은 축구장이기도 하고 야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벽돌을 쌓아 올려놓은 담벼락과 등지고 있는 집 사이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비좁고 지저분하고 길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었습니다. 눈 오는 새벽 조용히 쌓이는 눈 구경을 하러 2층 방에서 나왔다가 평소에 눈을 두지 않았던 그 좁은 공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에 존중과 인간적인 관계에서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대한 사회적인 약속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자식은 부모가 낳은, 도구 같은 존재이고 소유물인 데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가정은 그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그리 순종적이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저 혼자만 생각하고 사건 사고 만드는 일이 많았고, 집안의 가전제품을 마음대로 중고 거래로 팔아버리고, 탁자 위에 놓인 돈을 무작정 들고 나가 아이들과 학용품을 사서 나눠 가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일요일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귀가 시간도 잊고 놀다 가족의 걱정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날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 일 뒤에 경험한 무자비하고 아픈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듯이 맞는다는 표현이 저에게는 딱 맞았는데, 그 당시에는 잘못하면 그렇게 맞는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맞다 보면 때리는 사람도 지쳐서인지 주저앉아 버리고 저는 그 틈을 타서 도망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집 이 층 계단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숨었는데, 옥상을 올라기면 발소리가 들려서 항상 들키곤 했습니다. 그러면 반성도 없이 도망하였다고 다시 한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벌을 세우는데 다시 맞는 것이 두려웠던 저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손을 들고 벌을 서곤 했습니다.
가정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에 비해서 학교에서는 큰 문제 없이 지냈습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동안에는 성적이 떨어지면 혼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거나 의사의 꿈을 키워서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겠다 같은 거창한 꿈은 한번도 꾸어본 일이 없습니다. 단지 맞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다행히 초등학교에서는 당시에 아무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들 때면 ‘이번에도 동균이가 일등이다’라는 말로 선생님은 칭찬해주었지만 저는 뿌듯함 같은 마음은 전혀 갖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 바빴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갈수록 집안의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부침을 겪다 보니 부모님은 두 분 다 인생의 쓴맛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도 다툼이 많아지고, 다툼 뒤에 폭력이 가해지면 저는 그것을 막아서다 또다시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맞는 사람에게까지 비난을 수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가 아니었으면 금방 끝날 일이 너 때문에 커졌다’ 이런 말을 들은 뒤로는 더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에 대한 폭력이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맞다가 처음으로 들키지 않는 도피처가 담벼락 사이였습니다.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창문 너머 담벼락을 타고 들려오기는 했지만,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았고,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는지 담벼락 뒤에 숨은 날은 한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곤충을 참 무서워해서 지하실의 귀뚜라미만 봐도 비명을 지르는 아이였는데 담벼락에 숨은 날에는 그사이에 온갖 벌레가 기어 다녀도 꾹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폭력이라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가끔 제가 사무실에서 ‘저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우스갯소리를 이야기했는데, 저에게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폭력은 몸에 상흔을 남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속까지 침습했었습니다. 가장 큰 감정은 무력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폭력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뭘 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무력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다음번에 맞을 때는 웃으면서 맞아보자, 때리지 말라고 빌지 말자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폭력이 발길질로 이어질 때쯤이면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정도가 되면 몸은 솟아오르는 아드레날린 덕분에 아픔을 거의 못 느꼈지만, 마음은 계속 찢어졌습니다. 무력감이란 의지를 강하게 다질수록 더 크게 찾아오는 참 나쁜 감정입니다.
무력감이 스멀스멀 사라지는 시점이 오면 심한 무기력감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밤샘을 하고 난 뒤에 오는 무기력감은 모든 힘을 다 써버린 탈진과 비슷한 것이라서 그대로 침대에 쓰려져서 하루 푹 자면 사라지곤 합니다. 심한 무력감 뒤에 찾아오는 무기력감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시험을 앞둔 날을 생각해보면 다시 맞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렇게 해도 또다시 다른 이유로 맞을 테니 의미가 없다는 마음이 서로 무한하게 공회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이 끊임없이 타들어 가는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런 서로 다른 생각으로 고통이 계속되면 동네 근처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온종일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당시 또래보다 게임을 꽤 잘했는데 어떤 게임을 잡아도 무한 반복하는 게임은 끝없이 했고, 끝이 있는 게임은 마지막 라운드까지 클리어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로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게임을 집중해서 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게임이 마음이 살기 위한 생존 활동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맞을 것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마음 도피처였던 것 같습니다.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공허감이었습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라는 존재를 이해해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감정은 혼자서 극복하기 참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제가 그 폭력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이라도 폭력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책임감 덕분이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그런 책임감이 없었다면 저는 공허감에 삼켜져서 어쩌면 생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늘 맞는 것에 굴복하는 자신이 참 싫었던 저였는데, 담벼락 사이 숨어서 벽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맞는 사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요. 혼자 조용히 있다가 밤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그 담벼락 사이에도 들이비쳤습니다. 어두운 담벼락 사이에 풀벌레 같은 것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빛이 들자 환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볼 수 없었지만, 저도 그 풀벌레처럼 빛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맞는 것은 제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자책하는 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두 번째 화살이라고 부르더군요.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나에게 쏘는 것이라 훨씬 아프게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듭니다. 자책이라는 두 번째 화살을 저는 살면서 쏘지 않고 부러뜨리기 위해서 참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맞으면서 알게 된 것은 어떤 일이건 행복과 불행과 관계없이 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지나도 어제 일처럼 흐려지지 않는 것이 있지만 끝은 있습니다.
저는 그날 담벼락에서 이 모든 불행이 끝난 뒤 해보고 싶은 일을 담벼락에 하나씩 돌로 세기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 무엇을 적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문장은 기억합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말자”
그 한 문장이 오랫동안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애써 힘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순간은 언제나 있지만, 지나간 뒤에 다시 일어설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신의 마음에도 당신을 지켜줄 한 문장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언젠가는 분명히 빛이 찾아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담벼락
오래전 살던 집은 막다른 골목길에 있었습니다. 담벼락으로 막혀 있는 그 골목은 축구장이기도 하고 야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벽돌을 쌓아 올려놓은 담벼락과 등지고 있는 집 사이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비좁고 지저분하고 길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었습니다. 눈 오는 새벽 조용히 쌓이는 눈 구경을 하러 2층 방에서 나왔다가 평소에 눈을 두지 않았던 그 좁은 공간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이야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에 존중과 인간적인 관계에서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대한 사회적인 약속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의식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자식은 부모가 낳은, 도구 같은 존재이고 소유물인 데다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정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제가 경험한 가정은 그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그리 순종적이지 않았던 아이였습니다. 저 혼자만 생각하고 사건 사고 만드는 일이 많았고, 집안의 가전제품을 마음대로 중고 거래로 팔아버리고, 탁자 위에 놓인 돈을 무작정 들고 나가 아이들과 학용품을 사서 나눠 가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일요일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귀가 시간도 잊고 놀다 가족의 걱정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날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 일 뒤에 경험한 무자비하고 아픈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 오는 날 먼지 날리듯이 맞는다는 표현이 저에게는 딱 맞았는데, 그 당시에는 잘못하면 그렇게 맞는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맞다 보면 때리는 사람도 지쳐서인지 주저앉아 버리고 저는 그 틈을 타서 도망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집 이 층 계단을 통해서 옥상으로 올라가서 숨었는데, 옥상을 올라기면 발소리가 들려서 항상 들키곤 했습니다. 그러면 반성도 없이 도망하였다고 다시 한참을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벌을 세우는데 다시 맞는 것이 두려웠던 저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손을 들고 벌을 서곤 했습니다.
가정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에 비해서 학교에서는 큰 문제 없이 지냈습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동안에는 성적이 떨어지면 혼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거나 의사의 꿈을 키워서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겠다 같은 거창한 꿈은 한번도 꾸어본 일이 없습니다. 단지 맞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다행히 초등학교에서는 당시에 아무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1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들 때면 ‘이번에도 동균이가 일등이다’라는 말로 선생님은 칭찬해주었지만 저는 뿌듯함 같은 마음은 전혀 갖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 바빴습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갈수록 집안의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부침을 겪다 보니 부모님은 두 분 다 인생의 쓴맛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도 다툼이 많아지고, 다툼 뒤에 폭력이 가해지면 저는 그것을 막아서다 또다시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해 안 되는 것은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맞는 사람에게까지 비난을 수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가 아니었으면 금방 끝날 일이 너 때문에 커졌다’ 이런 말을 들은 뒤로는 더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에 대한 폭력이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맞다가 처음으로 들키지 않는 도피처가 담벼락 사이였습니다.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창문 너머 담벼락을 타고 들려오기는 했지만,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았고,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는지 담벼락 뒤에 숨은 날은 한번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곤충을 참 무서워해서 지하실의 귀뚜라미만 봐도 비명을 지르는 아이였는데 담벼락에 숨은 날에는 그사이에 온갖 벌레가 기어 다녀도 꾹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폭력이라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가끔 제가 사무실에서 ‘저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라고 우스갯소리를 이야기했는데, 저에게 그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폭력은 몸에 상흔을 남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속까지 침습했었습니다. 가장 큰 감정은 무력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폭력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이 크게 자리 잡았습니다. 뭘 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무력감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노력을 안 해본 것은 아닙니다. 다음번에 맞을 때는 웃으면서 맞아보자, 때리지 말라고 빌지 말자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폭력이 발길질로 이어질 때쯤이면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정도가 되면 몸은 솟아오르는 아드레날린 덕분에 아픔을 거의 못 느꼈지만, 마음은 계속 찢어졌습니다. 무력감이란 의지를 강하게 다질수록 더 크게 찾아오는 참 나쁜 감정입니다.
무력감이 스멀스멀 사라지는 시점이 오면 심한 무기력감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밤샘을 하고 난 뒤에 오는 무기력감은 모든 힘을 다 써버린 탈진과 비슷한 것이라서 그대로 침대에 쓰려져서 하루 푹 자면 사라지곤 합니다. 심한 무력감 뒤에 찾아오는 무기력감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시험을 앞둔 날을 생각해보면 다시 맞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렇게 해도 또다시 다른 이유로 맞을 테니 의미가 없다는 마음이 서로 무한하게 공회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이 끊임없이 타들어 가는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런 서로 다른 생각으로 고통이 계속되면 동네 근처에 있는 오락실에 가서 온종일 게임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당시 또래보다 게임을 꽤 잘했는데 어떤 게임을 잡아도 무한 반복하는 게임은 끝없이 했고, 끝이 있는 게임은 마지막 라운드까지 클리어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동전 하나로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게임을 집중해서 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게임이 마음이 살기 위한 생존 활동 같은 것이었습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맞을 것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것이 유일한 마음 도피처였던 것 같습니다.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공허감이었습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세상에 저라는 존재를 이해해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감정은 혼자서 극복하기 참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는데, 제가 그 폭력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이라도 폭력으로부터 지켜내야겠다는 책임감 덕분이지 않나 싶습니다. 만약 그런 책임감이 없었다면 저는 공허감에 삼켜져서 어쩌면 생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늘 맞는 것에 굴복하는 자신이 참 싫었던 저였는데, 담벼락 사이 숨어서 벽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맞는 사람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이 잘못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요. 혼자 조용히 있다가 밤을 지나고 아침 햇살이 그 담벼락 사이에도 들이비쳤습니다. 어두운 담벼락 사이에 풀벌레 같은 것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빛이 들자 환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볼 수 없었지만, 저도 그 풀벌레처럼 빛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맞는 것은 제가 선택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자책하는 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두 번째 화살이라고 부르더군요.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나에게 쏘는 것이라 훨씬 아프게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듭니다. 자책이라는 두 번째 화살을 저는 살면서 쏘지 않고 부러뜨리기 위해서 참 많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맞으면서 알게 된 것은 어떤 일이건 행복과 불행과 관계없이 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지나도 어제 일처럼 흐려지지 않는 것이 있지만 끝은 있습니다.
저는 그날 담벼락에서 이 모든 불행이 끝난 뒤 해보고 싶은 일을 담벼락에 하나씩 돌로 세기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 무엇을 적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문장은 기억합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말자”
그 한 문장이 오랫동안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애써 힘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순간은 언제나 있지만, 지나간 뒤에 다시 일어설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신의 마음에도 당신을 지켜줄 한 문장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언젠가는 분명히 빛이 찾아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2024-11-15 (No.57)
Memento mori
인간 감정의 형태는 다양하다. 기쁨, 공포, 놀람, 슬픔, 분노, 믿음, 혐오, 사랑, 호기심. 그리고, 그 외에 각자 경험과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따른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생각하면 무수한 종류가 있다. 굳이 인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면 언급한 감정 중에 인간과 큰 차이 없이 비슷한 감정이 있다고 보인다. 많은 감정 종류 중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감정은 호기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기심, 한자로는 好奇心이라 쓰는데 좋아할 호, 기이할 기, 마음 심의 의미로 보인다. 우리말 문장으로 풀어 쓴다면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 감정 형태가 무수히 많다고 표현한 것은 호기심이라는 감정 하나만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취미 동호회 개수가 1만 개를 넘어선다는 최근 기사를 보면 사람들 관심사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흔히 알려진 산악동호회만 놓고 봐도 특정한 산을 다니는 모임부터, 난코스만 찾아다니는 동호회, 산은 등산로 입구까지만 가고 술자리으로 빠지는 모임까지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모임이라고 한 종류로 치부하기에는 호기심의 범주가 너무도 넓다.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와 관련하여 궁금함이 있는 행동, 특성 또는 감정을 나타낼 수도 있다. 행동과 감정으로서의 호기심은 과학, 언어, 산업의 발전과 같은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호기심을 보면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 발전 원동력의 근원적인 힘은 나태함이라고 믿는 편이지만, 만약 인간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근원적인 욕구가 있어도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하기 어려웠을 테니 호기심이 인간 발전의 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나’라는 개인만 놓고 볼 때도 호기심이 없었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기에 호기심의 가치는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호기심 영역이 분명히 다를 텐데 나는 특히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이 매우 깊다. 깊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집에 있는 냉장고나 TV를 분해해서 망가뜨리는 지경이었다.
호기심의 시작은 작은 장난감이었다. 원판이 돌아가면서 물고기가 입을 내밀며 자석 낚싯대로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장난감이었는데 비정형적으로 입이 벌어지는 장난감의 구조가 매우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분해를 했던 것이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의 첫 기억이다. 드라이버와 같은 공구를 쉽게 사용할 수 없었던 때라서 분해라고 표현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들고 때려 부수는 과정이었기에 그 일로 병원 상담까지 받았다. 물고기 입 벌어지는 것이 궁금해서 뜯어보려 했던 것뿐이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어른 눈에는 장난감에 분노를 표출하는 아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냉장고 분해는 호기심 프로젝트 중에서도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고,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TV를 분해할 때는 고전압이 걸려 있는 부품을 터뜨려서 TV가 아니라 집을 태워버릴 뻔한 일도 있었다. 그 뒤로는 약간 지혜가 생겼는지 너무 무리한 것에 대한 호기심 도전은 하지 않게 되었다. TV 사건 뒤로 주된 호기심 대상은 작은 전자제품류였는데 노트북, 모바일폰, WIFI 장비 같은 것이다. 호기심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PC를 사용해볼 수 있었고,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PC 통신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으니, 호기심이 인생에 준 영향이 막대하다. PC 통신동아리 경력을 인정받아 첫 직장을 IT 회사에서 시작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어느 순간부터 전자제품의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 불꽃이 꺼져버렸는데 유튜브라는 녀석 덕분이다. 기기묘묘한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전문 리뷰어가 제품 정식 출시 전에 미리 받아서 분해까지 해서 영상으로 보여주니 클릭 몇 번으로 세상 만물 구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든 클릭 몇 번이면 궁금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이 꺼졌다. 누구나 원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나에게는 더는 그 가치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정한 듯하다.
그렇게 호기심을 잃고 지내다가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은 뒤로는 인간의 구조와 생명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렇다고 생물학이나 의학을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아니고, 삶의 구조와 원리를 상념처럼 추론하는 시간에 깊이 빠졌다. 한창 치료받기 시작할 즈음에는 개발 중이었던 인트라넷을 거의 완성해서 업무도 수월해진 상황이라 탐구해볼 시간은 충분했다. 아플 때 호기심은 몸부림과 비슷했는데,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이겨낼 방법과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그러던 중에 같은 병이지만 나보다 훨씬 위중했던 분이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찾은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Memento mori였다.
Memento mori
그대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처음에는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극복할 길을 찾아보려는 사람에게 죽음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조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견 허무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조언을 이해한 것은 여명 6개월을 병원에서 통지받은 날이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처음 마주할 때는 두려움이지만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삶의 종착지가 존재함을 이해하는 과정이 찾아온다.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언젠가 꺼진다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살면서 겪은 모든 일에 나만의 종결점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삶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삶 속에서 무수하게 주어지는 무게와 고통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일도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 되었고 Memento mori 의미는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 감정을 글로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작고 사소한 경험으로 조금은 설명해볼 수 있을 듯하다. 약속이 있어서 차를 가지고 이동했는데 마침 거센 비가 내리쳤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주차장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꽤나 걸어야 했는데, 이 비를 다 맞고 가면 하루가 엉망이 될 것 같았다. 그 비를 피할 도구가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렁크를 열어보니 파란 우산 하나 놓여 있었다. 그때야 생각이 났다. 누군가 놓고 간 우산을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는 사실이. 비 맞고 가야할 걱정은 놓아두고 간 파란 우산 덕분에 사라졌다.
Memento mori는 나에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속 우산 같은 감정이다. 수많은 감정의 폭우에 쓰러지지 않을 든든한 안식이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지나간 시간이 돌이킬 수 없음을 이해한다면, 나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이 내가 발견한 인생의 구조와 원리이다. 처음 물고기 낚시 게임기를 열어보던 행복감이 Memento mori라는 마음속 우산을 발견하였을 때 다시 찾아왔다.
상상해보자. 수십 년 뒤에 찾아올 임종의 순간을. 더는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아볼 수도, 내일의 태양을 볼 수도 없는 마지막 순간을.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시간 보내던 여유로움도, 즐겨 찾던 맛집에서의 한 끼 식사 같은 사소한 일상도 다시는 느껴볼 수 없는 날을. 임종 직전의 순간에서 오늘의 나로 시간을 되돌려 준다면 나는 어떤 선택으로 오늘을 보낼 것인가.
Memento mori
당신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의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Memento mori
인간 감정의 형태는 다양하다. 기쁨, 공포, 놀람, 슬픔, 분노, 믿음, 혐오, 사랑, 호기심. 그리고, 그 외에 각자 경험과 지향하는 삶의 방식에 따른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생각하면 무수한 종류가 있다. 굳이 인간이라고 표현했지만,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면 언급한 감정 중에 인간과 큰 차이 없이 비슷한 감정이 있다고 보인다. 많은 감정 종류 중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감정은 호기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호기심, 한자로는 好奇心이라 쓰는데 좋아할 호, 기이할 기, 마음 심의 의미로 보인다. 우리말 문장으로 풀어 쓴다면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 감정 형태가 무수히 많다고 표현한 것은 호기심이라는 감정 하나만 들여다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취미 동호회 개수가 1만 개를 넘어선다는 최근 기사를 보면 사람들 관심사 다양성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흔히 알려진 산악동호회만 놓고 봐도 특정한 산을 다니는 모임부터, 난코스만 찾아다니는 동호회, 산은 등산로 입구까지만 가고 술자리으로 빠지는 모임까지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모임이라고 한 종류로 치부하기에는 호기심의 범주가 너무도 넓다.
호기심이라는 용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으려는 욕구와 관련하여 궁금함이 있는 행동, 특성 또는 감정을 나타낼 수도 있다. 행동과 감정으로서의 호기심은 과학, 언어, 산업의 발전과 같은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호기심을 보면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인간 발전 원동력의 근원적인 힘은 나태함이라고 믿는 편이지만, 만약 인간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근원적인 욕구가 있어도 그것을 현실에서 실행하기 어려웠을 테니 호기심이 인간 발전의 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느낀다. ‘나’라는 개인만 놓고 볼 때도 호기심이 없었으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기에 호기심의 가치는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호기심 영역이 분명히 다를 텐데 나는 특히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이 매우 깊다. 깊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집에 있는 냉장고나 TV를 분해해서 망가뜨리는 지경이었다.
호기심의 시작은 작은 장난감이었다. 원판이 돌아가면서 물고기가 입을 내밀며 자석 낚싯대로 물고기를 건져 올리는 장난감이었는데 비정형적으로 입이 벌어지는 장난감의 구조가 매우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분해를 했던 것이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의 첫 기억이다. 드라이버와 같은 공구를 쉽게 사용할 수 없었던 때라서 분해라고 표현했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들고 때려 부수는 과정이었기에 그 일로 병원 상담까지 받았다. 물고기 입 벌어지는 것이 궁금해서 뜯어보려 했던 것뿐이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어른 눈에는 장난감에 분노를 표출하는 아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냉장고 분해는 호기심 프로젝트 중에서도 규모가 상당한 것이었고,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했다. TV를 분해할 때는 고전압이 걸려 있는 부품을 터뜨려서 TV가 아니라 집을 태워버릴 뻔한 일도 있었다. 그 뒤로는 약간 지혜가 생겼는지 너무 무리한 것에 대한 호기심 도전은 하지 않게 되었다. TV 사건 뒤로 주된 호기심 대상은 작은 전자제품류였는데 노트북, 모바일폰, WIFI 장비 같은 것이다. 호기심 덕분에 누구보다 빨리 PC를 사용해볼 수 있었고,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으로 PC 통신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으니, 호기심이 인생에 준 영향이 막대하다. PC 통신동아리 경력을 인정받아 첫 직장을 IT 회사에서 시작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어느 순간부터 전자제품의 구조와 원리에 관한 호기심 불꽃이 꺼져버렸는데 유튜브라는 녀석 덕분이다. 기기묘묘한 새로운 제품이 나와도 전문 리뷰어가 제품 정식 출시 전에 미리 받아서 분해까지 해서 영상으로 보여주니 클릭 몇 번으로 세상 만물 구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든 클릭 몇 번이면 궁금한 것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이 꺼졌다. 누구나 원하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나에게는 더는 그 가치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정한 듯하다.
그렇게 호기심을 잃고 지내다가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은 뒤로는 인간의 구조와 생명이라는 존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렇다고 생물학이나 의학을 깊이 있게 연구한 것은 아니고, 삶의 구조와 원리를 상념처럼 추론하는 시간에 깊이 빠졌다. 한창 치료받기 시작할 즈음에는 개발 중이었던 인트라넷을 거의 완성해서 업무도 수월해진 상황이라 탐구해볼 시간은 충분했다. 아플 때 호기심은 몸부림과 비슷했는데, 시시때때로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이겨낼 방법과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그러던 중에 같은 병이지만 나보다 훨씬 위중했던 분이 스스로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찾은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것이 Memento mori였다.
Memento mori
그대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처음에는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극복할 길을 찾아보려는 사람에게 죽음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조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견 허무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조언을 이해한 것은 여명 6개월을 병원에서 통지받은 날이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처음 마주할 때는 두려움이지만 그 순간을 지나고 나면 삶의 종착지가 존재함을 이해하는 과정이 찾아온다. 종료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언젠가 꺼진다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살면서 겪은 모든 일에 나만의 종결점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삶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는 등대가 되어 주었다. 삶 속에서 무수하게 주어지는 무게와 고통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일도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축복이 되었고 Memento mori 의미는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이 감정을 글로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나에게는 없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작고 사소한 경험으로 조금은 설명해볼 수 있을 듯하다. 약속이 있어서 차를 가지고 이동했는데 마침 거센 비가 내리쳤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주차장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꽤나 걸어야 했는데, 이 비를 다 맞고 가면 하루가 엉망이 될 것 같았다. 그 비를 피할 도구가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렁크를 열어보니 파란 우산 하나 놓여 있었다. 그때야 생각이 났다. 누군가 놓고 간 우산을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는 사실이. 비 맞고 가야할 걱정은 놓아두고 간 파란 우산 덕분에 사라졌다.
Memento mori는 나에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음속 우산 같은 감정이다. 수많은 감정의 폭우에 쓰러지지 않을 든든한 안식이다. 살아가는 모든 존재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지나간 시간이 돌이킬 수 없음을 이해한다면, 나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충실하게 채우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것이 내가 발견한 인생의 구조와 원리이다. 처음 물고기 낚시 게임기를 열어보던 행복감이 Memento mori라는 마음속 우산을 발견하였을 때 다시 찾아왔다.
상상해보자. 수십 년 뒤에 찾아올 임종의 순간을. 더는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아볼 수도, 내일의 태양을 볼 수도 없는 마지막 순간을.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시간 보내던 여유로움도, 즐겨 찾던 맛집에서의 한 끼 식사 같은 사소한 일상도 다시는 느껴볼 수 없는 날을. 임종 직전의 순간에서 오늘의 나로 시간을 되돌려 준다면 나는 어떤 선택으로 오늘을 보낼 것인가.
Memento mori
당신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의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를
2024-10-15 (No.56)
아주 예전에 쓴 글인데 누군가 감사하게도 스크랩 해주어서 남아 있길래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87년도 백골단 아저씨 잘 지내고 있습니까
87년도 광화문 어느 뒷 골목에서 내리 찍고 밟아 누른 덕분에 안와골절, 하퇴 복합 골절로 한 해 동안 누워지낸 1인입니다. 안와골절에 턱관절도 부숴졌었는데, 작은 조각은 못 건드리고 광대뼈만 귀쪽으로 걸어 올려서 수술했습니다. 턱을 움직일 수 없어서 6개월을 미음 같은 것을 흘려 넣어서 먹으면서 버텼고, 67kg 정도 나가던 체중이 근력이 빠지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45kg까지 내려갔었습니다.
병원에 있던 11개월 동안에 어머니가 저를 간병하시다가 쓰러지기를 두번 정도 하셨습니다. 한참을 맞다가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는 소리 들으면서 기억을 잃고 다시 깨어나니 응급실 수술 끝난 뒤였고, 긴급 수혈을 했음에도 출혈이 많아서 한동안 수혈을 더 받아야 했습니다. 수혈 받고 싶지 않아서 싫다고 억지 부리는데 응급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 이대로면 죽을 수도 있어요"
살면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가본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부러진 뼈보다도 내부에서 찢어진 근육과 피부가 신발에 짖밟히고 안쪽으로 감염이 일어나서 괴사 증상이 있어서 몇달 동안 뼈 접합 수술을 못하고 피부 조직을 살리는 치료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안면 골절은 1차 수술을 했고, 부러진 다리는 계속 근 위축 현상이 있어서 발꿈치를 뚫어 추를 달아서 근육 위축이 안되도록 추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몸은 커녕 누워있는 침대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침대를 움직이면 추가 움직여서 다리가 다시 부스러지는 통증을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인가에는 받쳐 놓은발목에서 욕창이 생겨서 인대가 손상되기도 했습니다.
응급 수술 뒤에 깨어나서도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다리 수술이 잘 안되어서 3번 재수술을 했을때 마지막 수술실 들어갈때 한번 울었습니다. 마지막 수술에서는 뼈를 너무 오랫동안 벌려 놓아서 어쩔 수 없이 골반뼈를 일부 깍아서 무언가를 채취해서 접합 부위에 이식하는 수술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다 낫고 나면 허리벨트 맬때 허리에 걸릴까 농담하면서 담담한 척 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농담을 듣고는 병실 나가셔서 흐느껴 우셨습니다. 그 울음 참는 소리가 병실까지 들려와서 결국 저도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되고 6개월을 누워 있던 침대를 끌고 어머니가 복도로 나가셨습니다. 6인실 병실에서 얼굴 골절 등 때문에 6개월 가량을 누워만 지내면서 창가쪽으로 갈 수 없어서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있었지만, 6개월만에 병실 복도 끝 창가에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저는 그 기간 동안 통증과 아픔에 빠져서 일상생활을 완전히 잊고 지냈었습니다. 일상 생활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를 그 날 배우기도 했지만, 그날 흘린 눈물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마지막 눈물은 퇴원 후 집에 돌아오는 날 흘렸습니다. 그당시 집이 2층이어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워낙에 소염진통이완제를 장복하고 몸을 쓰지 못해서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연로하신 아버지 등에 업혀서 올라왔는데, 아버지 등이 들썩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울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제가 너무 가벼워져서 너무 마음이 아프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날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긴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군가는 정권의 개가 되어서 보상을 챙겨 받으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 길위 섰던 것일까, 그날 나 한사람 없어도 되는데 왜 나간 것일까. 내가 생각했던 애국이 결국은 부모님 눈에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앞으로 애국이라는 것을 다시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그날 침대에 누워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저의 머리가 그렇게 좋지 못해서 MB가 명박산성 쌓을때도 같은 곳에 나섰고, 촛불 때도, 지금도 나서고 있습니다. 그때 저 스스로에게 했던 왜 라는 질문에 아직 완전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그때 그날 헬멧 너머로 잇몸을 들어내고 괴성을 지르며 제가 졸도할때까지 몸을 찍어 누르던 백골단 아저씨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있고, 여전히 인간 안되었다면 어제 오늘 광화문 같은 길에서 아까운 태극기 낭비하면서 박사모 노릇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더 큰 이유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망언을 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저는 5.18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여서 그분들의 비극과 희생과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87년의 6월에 같은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그 분들의 비극과 고통에 공감하는 바가 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을, 민주화를 위해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희생했던 분들의 고귀한 신념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참기 어려운 마음에 과거의 경험을 적어 봅니다.
여러분, 그 분들은 모두 각자 한사람 한사람,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당해서도 안되는 고통과 비극을 감내하고 이겨내면서, 오늘을 만든 의인들입니다. 이 분들의 희생의 역사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더 이상 상처 받아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아주 예전에 쓴 글인데 누군가 감사하게도 스크랩 해주어서 남아 있길래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87년도 백골단 아저씨 잘 지내고 있습니까
87년도 광화문 어느 뒷 골목에서 내리 찍고 밟아 누른 덕분에 안와골절, 하퇴 복합 골절로 한 해 동안 누워지낸 1인입니다. 안와골절에 턱관절도 부숴졌었는데, 작은 조각은 못 건드리고 광대뼈만 귀쪽으로 걸어 올려서 수술했습니다. 턱을 움직일 수 없어서 6개월을 미음 같은 것을 흘려 넣어서 먹으면서 버텼고, 67kg 정도 나가던 체중이 근력이 빠지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45kg까지 내려갔었습니다.
병원에 있던 11개월 동안에 어머니가 저를 간병하시다가 쓰러지기를 두번 정도 하셨습니다. 한참을 맞다가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는 소리 들으면서 기억을 잃고 다시 깨어나니 응급실 수술 끝난 뒤였고, 긴급 수혈을 했음에도 출혈이 많아서 한동안 수혈을 더 받아야 했습니다. 수혈 받고 싶지 않아서 싫다고 억지 부리는데 응급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 이대로면 죽을 수도 있어요"
살면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가본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부러진 뼈보다도 내부에서 찢어진 근육과 피부가 신발에 짖밟히고 안쪽으로 감염이 일어나서 괴사 증상이 있어서 몇달 동안 뼈 접합 수술을 못하고 피부 조직을 살리는 치료를 했습니다. 그 사이에 안면 골절은 1차 수술을 했고, 부러진 다리는 계속 근 위축 현상이 있어서 발꿈치를 뚫어 추를 달아서 근육 위축이 안되도록 추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몸은 커녕 누워있는 침대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침대를 움직이면 추가 움직여서 다리가 다시 부스러지는 통증을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인가에는 받쳐 놓은발목에서 욕창이 생겨서 인대가 손상되기도 했습니다.
응급 수술 뒤에 깨어나서도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다리 수술이 잘 안되어서 3번 재수술을 했을때 마지막 수술실 들어갈때 한번 울었습니다. 마지막 수술에서는 뼈를 너무 오랫동안 벌려 놓아서 어쩔 수 없이 골반뼈를 일부 깍아서 무언가를 채취해서 접합 부위에 이식하는 수술까지 이어졌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다 낫고 나면 허리벨트 맬때 허리에 걸릴까 농담하면서 담담한 척 했지만, 어머니는 저의 농담을 듣고는 병실 나가셔서 흐느껴 우셨습니다. 그 울음 참는 소리가 병실까지 들려와서 결국 저도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되고 6개월을 누워 있던 침대를 끌고 어머니가 복도로 나가셨습니다. 6인실 병실에서 얼굴 골절 등 때문에 6개월 가량을 누워만 지내면서 창가쪽으로 갈 수 없어서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있었지만, 6개월만에 병실 복도 끝 창가에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저는 그 기간 동안 통증과 아픔에 빠져서 일상생활을 완전히 잊고 지냈었습니다. 일상 생활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를 그 날 배우기도 했지만, 그날 흘린 눈물은 솔직히 말씀드려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마지막 눈물은 퇴원 후 집에 돌아오는 날 흘렸습니다. 그당시 집이 2층이어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워낙에 소염진통이완제를 장복하고 몸을 쓰지 못해서 계단을 올라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연로하신 아버지 등에 업혀서 올라왔는데, 아버지 등이 들썩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하지 않았지만, 울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나중에 여쭤보니 제가 너무 가벼워져서 너무 마음이 아프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날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긴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군가는 정권의 개가 되어서 보상을 챙겨 받으면서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 길위 섰던 것일까, 그날 나 한사람 없어도 되는데 왜 나간 것일까. 내가 생각했던 애국이 결국은 부모님 눈에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앞으로 애국이라는 것을 다시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그날 침대에 누워서 거리에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저의 머리가 그렇게 좋지 못해서 MB가 명박산성 쌓을때도 같은 곳에 나섰고, 촛불 때도, 지금도 나서고 있습니다. 그때 저 스스로에게 했던 왜 라는 질문에 아직 완전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두가지 입니다. 그때 그날 헬멧 너머로 잇몸을 들어내고 괴성을 지르며 제가 졸도할때까지 몸을 찍어 누르던 백골단 아저씨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아저씨가 아직도 살아 있고, 여전히 인간 안되었다면 어제 오늘 광화문 같은 길에서 아까운 태극기 낭비하면서 박사모 노릇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더 큰 이유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망언을 하는 이들 때문입니다. 저는 5.18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여서 그분들의 비극과 희생과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87년의 6월에 같은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으로서 그 분들의 비극과 고통에 공감하는 바가 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을, 민주화를 위해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희생했던 분들의 고귀한 신념을 더럽히는 모든 행위를 참기 어려운 마음에 과거의 경험을 적어 봅니다.
여러분, 그 분들은 모두 각자 한사람 한사람, 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당해서도 안되는 고통과 비극을 감내하고 이겨내면서, 오늘을 만든 의인들입니다. 이 분들의 희생의 역사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더 이상 상처 받아서는 안된다고 믿습니다.
2023-05-19 (No.55)
2021-08-09 (No.53)
당신의 바다
아는 후배에게서 어느 날 급한 연락이 왔다. 일손이 부족해서, 준비한 반찬을 담고 필요한 분들에게 보내드릴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요리라면 모를까, 담는 정도면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날의 내 생각이 실수였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무언가 이끌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막상 찾아간 그곳은 ‘반찬을 담는 일만’ 하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떤 재료는 손질도 덜 끝났고, 볶음은 이제 막 간을 맞추고 있던 참이다. 주방은 좁고 그릇은 부족하다 보니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조리하고, 끝나면 담고 식어서 김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하나씩 포장을 해야 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그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망망대해 끝을 넘어 수평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반찬 하나하나, 국 한 그릇마다 필요한 요리법이 기록으로 있어서 하나씩 손발을 맞춰 가면서 조리하기 시작했다.
냉방 시설도 없는 조리실에서 땀이 맺혀서 행여나 반찬에 떨어질까 싶어, 마치 어느 요릿집 나오는 영화에서처럼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화구 앞에서 진미채를 볶기를 반복했다. 처음 해보기도 했지만, 진미채처럼 잘 타는 양념이 들어가는 반찬은 실제로 해보니 한 번에 많은 양을 하면 나 같은 초보로서는 제대로 해낼 방법이 없었기에 조금씩 양을 덜어서 조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초보의 손 하나 더 보탠 것으로는 일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경험 없는 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마치 초인처럼 일을 해치운 덕분에 적당한 시간에 조리를 마칠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각자의 지갑을 열어서 준비하는 밥과 반찬이라 양이 넉넉할 리가 없다. 반찬 한 가닥이라도 흘려 못 쓰게 되면 누군가의 도시락에는 빈자리가 생길 것이기에 찬 하나하나 덜어 넣는 손길이 분주함 속에도 신중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라면 정도 끓여 내고 요리사인 양 의기양양 했던 정도가 요리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그날 그곳에서 주방일의 치열한 뜨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볶음을 마치고 마지막 반찬 그릇을 닫은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는데, 신고 있던 주방 장화 속에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몸도 마음도 흠뻑 젖어있었다. 불 앞에 칼 들고 서 있던 긴장감이 물러서자 피로감이 밀려왔다. 주방에 잠시 서 있었던 것뿐인데, 몸은 단축 마라톤 뛴 누군가의 다른 몸처럼 무거웠다.
쉴 틈은 없다. 이제 각각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해드려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긴 거리는 차로 한 번에 이동했지만, 골목 골목을 다니는 것은 두 다리에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계단길이나 오르막을 등짐에 도시락을 담고 올라가야 하는데 한 사람은 나르고 한 사람은 메고 올라가야 하다 보니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짊어질 몫이 적지 않다. 정확한 무게를 알 수 없었지만, 한 시간 배달을 마치고 내리막을 내려올 때는 다리가 뜻대로 지탱하지 못해서 잠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조리실에서 땀에 절여지던 순간순간, 오르막을 오르던 가쁜 호흡 중에 잠시 혼란스러웠음을 인정해야겠다. ‘평생을 이렇게 도와드릴 수도 없을 텐데, 한 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확실히 생각나는 건 그런 생각이 부끄러워서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웠다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잠시 들를 곳이 있다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먼저 가겠다고 했지만, 문득 언덕을 오르면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끝나면 꼭 들러’라고 누군가 하신 말씀에 정신이 쏙 빠져 있던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답을 했는데, 그걸 후배가 들은 모양이다. 그것도 약속이라면 약속이기에 약속을 지키려 찾아갔다. 그렇게 만난 분이 ‘감나무 집 할머니’, 당신 스스로는 ‘김할매’라고 부르라던 분이다. 김 할머니도 아니고 김할매라니, 내 나이 두 배도 더 된 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김할매라고 부를 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 거부감을 내려놓았다.
김할매는 젊을 때 오랫동안 물질을 했는데, 육지에서 만난 남편분에게 반해서 바다를 떠나 생활해온 지 셀 수 없는 날이 지났다고 하셨다. 김할매가 그렇게 사랑하던 바다를 떠나게 만든 남편분은 정작 너무 일찍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김할매가 몸이 아플 때 병간호하면서 막일을 하다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물을 수 없어서 소문으로 들은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김할매의 방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는데, 잠수복을 입은 김할매의 오래전 사진이었다. 원래 흑백사진인 것인데 색이 바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파도가 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김할매의 젊은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돌아가신 남편분이 담아 주었을 그 사진은 그날 파도가 높아서 준비 다 했다가, 사랑하는 이가 너무 걱정해서 들어가지 않고 대신에 사진으로 남겼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다시 보자, 사진 속에는 없지만,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김할매는 그 사진을 보면 그날 그때 사진을 담아 주던 남편의 모습이 고스란히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후배가 부탁하지 않아도 몇 번을 더 도시락 준비하는 날 함께 했다. 조리실의 처음 기억은 텁텁한 공기, 더운 열기, 반찬 냄새가 뒤섞인 혼란스러움과 늘 쫓기는 부산스러움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반찬을 담은 순간마다 김할매가 생각이 났다. 환하게 맞이하는 주름진 얼굴 속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환대와 김할매 집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장을 보면서 이미 수십 번을 들어서 다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할 때 반짝이며 남편분을 기억하는 김할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도시락 배달일은 다음 해 김할매가 소천할 때까지 했다. 건강이 안 좋아진 날 무언가 직감하였는지 김할매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 했고, 나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김할매도 알고 계셨으리라. 대답할 때 나의 진심을...
김할매는 결국 당신의 바다를 다시 찾아가셨을까? 그곳에서 사진 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오랫동안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김할매 눈동자 속에 비친 남편분도 만나셨다면 좋겠다. 당신의 그 아름다운 바다에서 항상 행복하기를.
당신의 바다
아는 후배에게서 어느 날 급한 연락이 왔다. 일손이 부족해서, 준비한 반찬을 담고 필요한 분들에게 보내드릴 시간을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요리라면 모를까, 담는 정도면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말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날의 내 생각이 실수였는지 아니면 필연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무언가 이끌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막상 찾아간 그곳은 ‘반찬을 담는 일만’ 하면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떤 재료는 손질도 덜 끝났고, 볶음은 이제 막 간을 맞추고 있던 참이다. 주방은 좁고 그릇은 부족하다 보니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하면서 조리하고, 끝나면 담고 식어서 김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하나씩 포장을 해야 하는 일이 놓여 있었다. 그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망망대해 끝을 넘어 수평선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반찬 하나하나, 국 한 그릇마다 필요한 요리법이 기록으로 있어서 하나씩 손발을 맞춰 가면서 조리하기 시작했다.
냉방 시설도 없는 조리실에서 땀이 맺혀서 행여나 반찬에 떨어질까 싶어, 마치 어느 요릿집 나오는 영화에서처럼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화구 앞에서 진미채를 볶기를 반복했다. 처음 해보기도 했지만, 진미채처럼 잘 타는 양념이 들어가는 반찬은 실제로 해보니 한 번에 많은 양을 하면 나 같은 초보로서는 제대로 해낼 방법이 없었기에 조금씩 양을 덜어서 조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고, 초보의 손 하나 더 보탠 것으로는 일이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경험 없는 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마치 초인처럼 일을 해치운 덕분에 적당한 시간에 조리를 마칠 수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각자의 지갑을 열어서 준비하는 밥과 반찬이라 양이 넉넉할 리가 없다. 반찬 한 가닥이라도 흘려 못 쓰게 되면 누군가의 도시락에는 빈자리가 생길 것이기에 찬 하나하나 덜어 넣는 손길이 분주함 속에도 신중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라면 정도 끓여 내고 요리사인 양 의기양양 했던 정도가 요리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그날 그곳에서 주방일의 치열한 뜨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볶음을 마치고 마지막 반찬 그릇을 닫은 뒤에야 정신이 돌아왔는데, 신고 있던 주방 장화 속에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몸도 마음도 흠뻑 젖어있었다. 불 앞에 칼 들고 서 있던 긴장감이 물러서자 피로감이 밀려왔다. 주방에 잠시 서 있었던 것뿐인데, 몸은 단축 마라톤 뛴 누군가의 다른 몸처럼 무거웠다.
쉴 틈은 없다. 이제 각각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해드려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긴 거리는 차로 한 번에 이동했지만, 골목 골목을 다니는 것은 두 다리에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계단길이나 오르막을 등짐에 도시락을 담고 올라가야 하는데 한 사람은 나르고 한 사람은 메고 올라가야 하다 보니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짊어질 몫이 적지 않다. 정확한 무게를 알 수 없었지만, 한 시간 배달을 마치고 내리막을 내려올 때는 다리가 뜻대로 지탱하지 못해서 잠시 쉬어야 할 정도였다.
조리실에서 땀에 절여지던 순간순간, 오르막을 오르던 가쁜 호흡 중에 잠시 혼란스러웠음을 인정해야겠다. ‘평생을 이렇게 도와드릴 수도 없을 텐데, 한 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확실히 생각나는 건 그런 생각이 부끄러워서 머릿속에서 재빨리 지웠다는 것이다.
일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잠시 들를 곳이 있다는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먼저 가겠다고 했지만, 문득 언덕을 오르면서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끝나면 꼭 들러’라고 누군가 하신 말씀에 정신이 쏙 빠져 있던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답을 했는데, 그걸 후배가 들은 모양이다. 그것도 약속이라면 약속이기에 약속을 지키려 찾아갔다. 그렇게 만난 분이 ‘감나무 집 할머니’, 당신 스스로는 ‘김할매’라고 부르라던 분이다. 김 할머니도 아니고 김할매라니, 내 나이 두 배도 더 된 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김할매라고 부를 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 거부감을 내려놓았다.
김할매는 젊을 때 오랫동안 물질을 했는데, 육지에서 만난 남편분에게 반해서 바다를 떠나 생활해온 지 셀 수 없는 날이 지났다고 하셨다. 김할매가 그렇게 사랑하던 바다를 떠나게 만든 남편분은 정작 너무 일찍 자신의 곁을 떠났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김할매가 몸이 아플 때 병간호하면서 막일을 하다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물을 수 없어서 소문으로 들은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김할매의 방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는데, 잠수복을 입은 김할매의 오래전 사진이었다. 원래 흑백사진인 것인데 색이 바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법 파도가 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김할매의 젊은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돌아가신 남편분이 담아 주었을 그 사진은 그날 파도가 높아서 준비 다 했다가, 사랑하는 이가 너무 걱정해서 들어가지 않고 대신에 사진으로 남겼던 날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다시 보자, 사진 속에는 없지만,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김할매는 그 사진을 보면 그날 그때 사진을 담아 주던 남편의 모습이 고스란히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후배가 부탁하지 않아도 몇 번을 더 도시락 준비하는 날 함께 했다. 조리실의 처음 기억은 텁텁한 공기, 더운 열기, 반찬 냄새가 뒤섞인 혼란스러움과 늘 쫓기는 부산스러움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고요해졌다. 반찬을 담은 순간마다 김할매가 생각이 났다. 환하게 맞이하는 주름진 얼굴 속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환대와 김할매 집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장을 보면서 이미 수십 번을 들어서 다 외우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할 때 반짝이며 남편분을 기억하는 김할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도시락 배달일은 다음 해 김할매가 소천할 때까지 했다. 건강이 안 좋아진 날 무언가 직감하였는지 김할매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바닷가에 가보고 싶다 했고, 나는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김할매도 알고 계셨으리라. 대답할 때 나의 진심을...
김할매는 결국 당신의 바다를 다시 찾아가셨을까? 그곳에서 사진 속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그토록 오랫동안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김할매 눈동자 속에 비친 남편분도 만나셨다면 좋겠다. 당신의 그 아름다운 바다에서 항상 행복하기를.
2021-08-09 (No.52)
농사일이 행복합니다
가을 농사 시작할 때 이야기다.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란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이라, 가을은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혜윰뜰은 도시농업공동체이다 보니 장점과 어려운 점도 공존한다. 혜윰뜰은 함께 하는 목적이 비교적 뚜렷하다. 도시농업공동체이니 그 이름에 걸맞게 경작과 수확이 첫 번째 목표이고, 공동체 공간을 30여 세대가 함께 가꾸는 마을 돌봄 활동이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때로는 넘치는 수확물을 보람있게 사용하기 위해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것도 함께하는 마을활동의 장점이다.
도시농부 활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때로는 난관이 되기도 한다. 가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병해충의 고난도 함께 안겨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일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농부의 텃밭 활동에도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가야만 할 때가 있다. 농부라는 이름을 내려놓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조금 더 현실감 있는 도시농부의 가을 역경을 그려보기 위해 부족하지만 짧은 지식을 꺼내 보면 도시농부의 가을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생명을 가진 세상 만물이 그렇듯이 가을 작물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륨, 칼슘과 같이 예전에 화학이나 지구과학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가을 농사를 맞이하는 도시농부는 이것들을 잘 살펴보고 보충해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소를 잠시 예로 든다면, 식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단백질의 구성성분이다. 인류사에 질소 비료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원소인데, 작물이 누렇게 아랫잎부터 시들면 질소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때이다.
영양이 되는 원소 이외에도, 가을 농사를 결정하는 변수는 여럿이 있다. 그중 하나가 토양인데, 재배할 작물에 맞춰서 적정한 토양 산도를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토양이 지나치게 산성화되면 석회 등을 공급해서 농사 전 중화해 두어야 병해에 의한 큰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석회를 사용할 때도 지혜가 필요한데, 지나치게 많으면 칼륨이나 질소의 흡수를 방해해서 오히려 농사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을 완벽히 했다고 생각해도 어느 날부터 작물의 성장이 더디거나, 열매 맺는 작물에 가로줄 균열이 생기고 잎줄기 안쪽이 썩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하게 습해서 그런가, 혹은 너무 햇살이 뜨거워서 작물이 힘들어 그런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환경 이외에 미량원소인 붕소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닌가도 살펴야 한다. 때로는 토양이 지나치게 습하면 붕소 흡수가 잘 안 되어서 부족하지 않아도 결핍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 농사에는 물주기도 또 다른 중요 변수다. 과한 습기를 막기 위해서 물 주는 시기를 놓치게 되면 가뭄 때와 같이 칼슘결핍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각종 결핍이나 변수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작물 생리장해 현상과 병충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복잡한 숙제가 있지만,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미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라는 목표가 얼마나 정복하기 어려운 과제인지는 충분히 보여준 것 같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혜윰뜰에서 가을 농사를 포기한 도시농부가 올해에는 없다. 배추 대신 쪽파를 선택하는 우회 전략을 짜는 이웃도 있고, 올해는 무 농사에 전념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혜윰뜰 도시농부는 이번에도 배추 농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 이유는 도시농부에게 있어서 배추는 가을 밭농사의 아름다운 꽃과 같기 때문이다. 앞서 꺼낸 다양한 난관과 걸림돌을 넘어서 수확의 시간을 맞이할 때 얻는 기쁨이 그동안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조금 어렵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고 소통이며, 마을공동체 안에 공존하는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이다.
얼마 전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를 위한 작물 선택을 하고 종자 나눔 하는 일이 있었다. 예년에는 모두 한날 모여서 종자를 나눔하고 서로 간 안부도 물으며 가을 농사를 시작했지만, 올해는 그런 모든 과정이 어렵게 되었다. 함께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비대면이라는 이름을 빌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로 표정 보며 응원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 멈추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가을 농사는 처음 경험하는 이웃에게도, 이미 그 길로 다녀본 이에게도 어려운 과정이기에 서로를 응원하는 시간은 도시농업공동체에는 중요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혜윰뜰 회원이 신청한 종자를 조금씩 나눠서 작은 봉투에 담아 각 세대 우편함을 통해서 분배하기로 하였다. 혜윰뜰에서는 무, 청갓, 적갓 등을 종자로 파종해서 가을 농사를 먼저 시작하는데, 종자란 녀석들은 터무니없이 그 크기가 작다. 코팅된 종자 하나가 좁쌀만 하여, 나눔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무씨를 대략 150개씩 나눔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섬세한 작업 과정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눈이 말썽이다 보니 정밀저울 작은 숫자를 보면서 나누어 담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잠시 고민하는 중에 운영위원회로 함께 하는 한 분이 올해 나누어 담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감사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말한 것도 없는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말 한마디가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이어서 또 다른 이웃은 나눈 것을 회원 각자 우편함에 전하는 일을 맡아서 하겠다는 배려가 이어진다.
종자 나누어 담기를 해준 이웃이 임무를 마쳤다는 연락에 찾으러 가보니 이건 보통 정성을 기울인 것이 아니다. 작은 종자를 수량에 맞춰 세어보고 무게를 확인해서 딱 맞게 나눔 해둔 그것뿐 아니라, 약봉지에 담아 밀봉을 하여서 나눔 하기에 참 좋게 해두었다. 덕분에 나눔도 산책하듯이 손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눔을 마친 다음 날, 함께 하는 대화방에 이런 글을 어느 회원이 올려주었다.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혜윰뜰 농사일이 행복합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을활동은 결국 정성이 전부라는 것을.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이웃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또 다른 이웃이 만나 이해와 감사의 통행이 시작될 때 그것이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을활동을 이어갈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다. 그러고 보니, 약봉지에 담은 것이 씨앗 뿐은 아닌 모양이다. 정성과 배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고르게 섞은 마을공동체를 위한 명약도 함께 처방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혜윰뜰 가을 농사의 행복한 수확은 벌써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농사일이 행복합니다
가을 농사 시작할 때 이야기다.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란 본격적인 농사의 시작이라, 가을은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혜윰뜰은 도시농업공동체이다 보니 장점과 어려운 점도 공존한다. 혜윰뜰은 함께 하는 목적이 비교적 뚜렷하다. 도시농업공동체이니 그 이름에 걸맞게 경작과 수확이 첫 번째 목표이고, 공동체 공간을 30여 세대가 함께 가꾸는 마을 돌봄 활동이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때로는 넘치는 수확물을 보람있게 사용하기 위해 나눔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것도 함께하는 마을활동의 장점이다.
도시농부 활동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때로는 난관이 되기도 한다. 가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 수확의 기쁨뿐 아니라 병해충의 고난도 함께 안겨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일상의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농부의 텃밭 활동에도 어려운 길임을 알면서도 가야만 할 때가 있다. 농부라는 이름을 내려놓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조금 더 현실감 있는 도시농부의 가을 역경을 그려보기 위해 부족하지만 짧은 지식을 꺼내 보면 도시농부의 가을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생명을 가진 세상 만물이 그렇듯이 가을 작물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륨, 칼슘과 같이 예전에 화학이나 지구과학 수업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것들이다. 가을 농사를 맞이하는 도시농부는 이것들을 잘 살펴보고 보충해줘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소를 잠시 예로 든다면, 식물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단백질의 구성성분이다. 인류사에 질소 비료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중요한 원소인데, 작물이 누렇게 아랫잎부터 시들면 질소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때이다.
영양이 되는 원소 이외에도, 가을 농사를 결정하는 변수는 여럿이 있다. 그중 하나가 토양인데, 재배할 작물에 맞춰서 적정한 토양 산도를 맞춰주는 것이 중요하다. 토양이 지나치게 산성화되면 석회 등을 공급해서 농사 전 중화해 두어야 병해에 의한 큰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석회를 사용할 때도 지혜가 필요한데, 지나치게 많으면 칼륨이나 질소의 흡수를 방해해서 오히려 농사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을 완벽히 했다고 생각해도 어느 날부터 작물의 성장이 더디거나, 열매 맺는 작물에 가로줄 균열이 생기고 잎줄기 안쪽이 썩는 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하게 습해서 그런가, 혹은 너무 햇살이 뜨거워서 작물이 힘들어 그런가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환경 이외에 미량원소인 붕소 결핍이 있는 것은 아닌가도 살펴야 한다. 때로는 토양이 지나치게 습하면 붕소 흡수가 잘 안 되어서 부족하지 않아도 결핍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 농사에는 물주기도 또 다른 중요 변수다. 과한 습기를 막기 위해서 물 주는 시기를 놓치게 되면 가뭄 때와 같이 칼슘결핍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각종 결핍이나 변수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작물 생리장해 현상과 병충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복잡한 숙제가 있지만,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미 도시농부에게 있어 가을 농사라는 목표가 얼마나 정복하기 어려운 과제인지는 충분히 보여준 것 같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혜윰뜰에서 가을 농사를 포기한 도시농부가 올해에는 없다. 배추 대신 쪽파를 선택하는 우회 전략을 짜는 이웃도 있고, 올해는 무 농사에 전념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혜윰뜰 도시농부는 이번에도 배추 농사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 이유는 도시농부에게 있어서 배추는 가을 밭농사의 아름다운 꽃과 같기 때문이다. 앞서 꺼낸 다양한 난관과 걸림돌을 넘어서 수확의 시간을 맞이할 때 얻는 기쁨이 그동안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힘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조금 어렵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고 소통이며, 마을공동체 안에 공존하는 다양성이 가져다주는 생명력이다.
얼마 전 혜윰뜰에는 가을 농사를 위한 작물 선택을 하고 종자 나눔 하는 일이 있었다. 예년에는 모두 한날 모여서 종자를 나눔하고 서로 간 안부도 물으며 가을 농사를 시작했지만, 올해는 그런 모든 과정이 어렵게 되었다. 함께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비대면이라는 이름을 빌려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로 표정 보며 응원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 멈추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가을 농사는 처음 경험하는 이웃에게도, 이미 그 길로 다녀본 이에게도 어려운 과정이기에 서로를 응원하는 시간은 도시농업공동체에는 중요한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혜윰뜰 회원이 신청한 종자를 조금씩 나눠서 작은 봉투에 담아 각 세대 우편함을 통해서 분배하기로 하였다. 혜윰뜰에서는 무, 청갓, 적갓 등을 종자로 파종해서 가을 농사를 먼저 시작하는데, 종자란 녀석들은 터무니없이 그 크기가 작다. 코팅된 종자 하나가 좁쌀만 하여, 나눔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때가 있다. 무씨를 대략 150개씩 나눔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섬세한 작업 과정이다.
개인적인 이유로 눈이 말썽이다 보니 정밀저울 작은 숫자를 보면서 나누어 담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잠시 고민하는 중에 운영위원회로 함께 하는 한 분이 올해 나누어 담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감사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말한 것도 없는데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말 한마디가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이어서 또 다른 이웃은 나눈 것을 회원 각자 우편함에 전하는 일을 맡아서 하겠다는 배려가 이어진다.
종자 나누어 담기를 해준 이웃이 임무를 마쳤다는 연락에 찾으러 가보니 이건 보통 정성을 기울인 것이 아니다. 작은 종자를 수량에 맞춰 세어보고 무게를 확인해서 딱 맞게 나눔 해둔 그것뿐 아니라, 약봉지에 담아 밀봉을 하여서 나눔 하기에 참 좋게 해두었다. 덕분에 나눔도 산책하듯이 손쉽게 마칠 수 있었다. 나눔을 마친 다음 날, 함께 하는 대화방에 이런 글을 어느 회원이 올려주었다.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헌신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혜윰뜰 농사일이 행복합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을활동은 결국 정성이 전부라는 것을.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이웃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또 다른 이웃이 만나 이해와 감사의 통행이 시작될 때 그것이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을활동을 이어갈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다. 그러고 보니, 약봉지에 담은 것이 씨앗 뿐은 아닌 모양이다. 정성과 배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고르게 섞은 마을공동체를 위한 명약도 함께 처방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혜윰뜰 가을 농사의 행복한 수확은 벌써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2021-08-02 (No.51)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
가끔 지나가는 길에 마주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지점 글귀를 어느 날 마주하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 앉았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는 문구에서 2017년 6월 7일,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던 2017년 6월 7일 그날은, 오후에 받은 한 통의 이메일로 기억 속에서 잊기 어려운 날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공동주택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감사로서 마을 역할을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전혀 모르던 나는 이웃의 생각이라도 바르게 듣자는 마음에 연락처를 전 세대와 관리 주체 직원 모두에게 공개해둔 상태였다. 가끔은 만용에 가까운 이 일을 후회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생각 없이 내 연락처를 모두에게 공개한 덕분에 나는 마을 역할에서 조금 덜 실패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인을 내가 사는 공동주택에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빠의 딸이라고 밝힌 분이 보내온 메일은 한 줄 한 줄이 읽기에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글이었다. 아직도 이메일을 간직하고 있는데, 장문의 이메일 중에서 몇 줄을 가져오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 아빠가 무악현대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계셔요..
작년에 아빠가 심하게 아프신 일이 있는데요.. 그게 더위 때문에 그랬다고 병원에서 알았어요.. 한번도 힘들다는 말씀 안하신 아빠인데.. 작년에는 참 많이 힘드셨는가봐요..
더위 먹어서 그렇다고 괜찮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직 제가 학교를 다니느라 도움이 못되어서 부끄러운데요.. 우연히 연락처를 알게 되어서요.. 아파트에서 간부님들께서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아빠가 너무 힘들게 올 여름도 지내실까봐 너무 걱정이 되어서어요.. 아빠 딸로 살면서 아빠가 항상 당당하신 모습만 봤었는데.. 이렇게 밖에 아빠에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편지 보낸 분이 죄송하다는 말로 맺는 이메일을 보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쳤다. 10년 넘게 사는 곳 경비실에 냉방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잠시 막막해졌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공동주택의 행정절차는 사뭇 복잡하다. 특히나 공용부분 (경비실, 놀이터, 17종류의 주민 공용시설 등)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편지를 받고 현황을 파악했던 날은 6월이었지만, 그해 여름의 더위에 대비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틀 동안 12개 경비초소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분을 초소별로 찾아뵙고 사과부터 드렸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한가지 약속과 부탁도 드렸다. 한가지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해 안에 경비초소에 냉방시설을 도입하겠다는 약속이었고, 부탁은 상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꼭 연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느 일방의 부탁이나 요청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진심과 선의가 신뢰로 맺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편지 한 통으로 시작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실무적인 절차를 실행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올바르게 일을 해도 어려운 자리이다. 서로 간 다른 이해관계의 중간 지점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을 내려놓고 제멋대로 하면 쉬운 역할일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함께 활동하는 그 당시 입주자대표회의에는 양심을 쉽게 내려놓은 분은 없었다. 입주자대표회의 어려운 처지를 알기에 모든 과정에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웃에게 사실 알리기였는데, 소통을 시작한 이웃이 50세대, 100세대를 넘어가면서 모두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단지 경비실에 지금까지 냉방시설이 없습니다”
세대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을 꺼내면 놀라지 않는 이웃이 없었다. 너무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이웃도 있었고, 태양광 사업을 하는 이웃은 경비실에 냉방장치 빨리 설치하고 태양광 도입하는 것을 돕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중에서 생각나는 한 분은 그 자리에서 경비실 12곳 전부에 설치할 냉방장치를 기증하겠다는 분이었다. 여름 더위가 막 시작하는 6월 중순이라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고, 공동주택에서 업무 절차가 얼마나 많은 과정으로 인해서 어려운 부분이 있는지를 잘 아는 이웃이었다.
처음 막막했던 마음은 이웃집을 100세대 방문을 마치던 시점에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들은 이웃의 의견을 그대로 정리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가지고 갔다. 2017년 6월 7일에 받았던 편지도 내용 빠짐없이 전해드렸고, 시기적절하게 서울시로부터 다음 내용과 같은 공문까지 올바른 판단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동주택 관리조례」 제6조의2 및「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 제62조 제7항에 경비원의 처우개선에 관한 내용을 정하고 있으며,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한「산업 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 제560조에서도 “사업자는 고열, 한냉, 다습작업이 실내인 경우에 냉난방 또는 통풍을 위하여 적절한 온도,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하여야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입주자대표회의회장님께 경비원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도움을 주실 것을 공문으로 협조요청 드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같은 해 여름 나는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아마도 편지를 보낸 분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지난해 여름 경비초소에서 여름 한낮에 더위에 잠시 혼절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경비실에 냉방시설 설치가 되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편지 보낸 따님이 사랑하는 아버님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차마 따님 되는 분이 편지를 보내서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다. 따님이 당신의 고통으로 아파했다는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연락에 감사하다는 인사 뒤 통화를 마쳤다.
특별하게 잘 지은 경비초소가 아니라면 대부분 공동주택 경비실의 여름철 실내 온도는 일기예보 온도보다 10% 이상 더 높다. 창문과 문을 열어 놓아도 온도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한번은 휴가로 비어 있는 초소에서 온도계로 여름철 실내 온도 측정을 해본 일이 있었는데 최고온도가 42도 가까이 찍혀 있었다. 그날 일기예보 상 온도는 서울 33도였던 날이다. 직접 측정해보고 눈으로 온도계 숫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근무환경이었다. 냉방시설 설치를 마무리 한 일에 작은 보람을 느꼈다.
한 번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입주자대표회의 활동은 다음 해부터 2020년 6월까지 두 번째 임기를 회장이라는 역할로 수행하게 되었다. 지난 여름의 혹독한 환경을 직접 확인했기에, 겨울이나 봄, 가을에는 어려움이 없을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용히 관리 주체와 상의하여 경비초소에서 근무를 서 보았다. 요란하게 떠들면서 근무를 한번 한 뒤에, 두 번 더 근무하면서 현장의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24시간 동안 경비초소와 정문 근무, 야간 순찰을 일과 시간표대로 하고 나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다. 특히 야간 시간에 잠을 자다가 순찰을 나가야 하는 여건이나, 휴식 시간에도 찾아오는 택배 보관이나 긴급한 일들이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벌레에, 겨울에는 추위에 수면시간에도 잠자리가 편할 수는 없었다. 여러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수의 입주자대표회의와 함께 조금씩 개선할 수 있었다.
공동주택 관리 주체에는 다양한 근무자가 있는데, 경비원 이외에도 청소근로자, 기전실 근무자와 같이 매일 공동주택의 시설 및 환경 관리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은 들여다보면 생각하지도 못한 그늘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사진은 과거 모습지만, 사는 단지의 근무자용 샤워 환경이었다. 급수펌프가 가동되는 시끄러운 환경은 둘째치고, 샤워하면서 주위로부터 몸을 가릴 부스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경비초소에서 근무했던 날 땀에 흠뻑 젖어서 이 상태에서 잠시 샤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생각이 미쳐서 알아본 직원 휴게시설과 샤워 시설은 나에게 또 하나의 냉방시설 없는 경비초소 같았다. 다행히 문제 인식과 해결에 뜻을 같이하는 입주자대표회의 덕분에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은 최소한의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은 되었다. 나는 임기가 끝났지만,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입주자대표회의는 지금도 선한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데,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천하려 애쓰시는 모습이 늘 고맙다. 2021년에 실행하는 무악에너지자립마을 사업에서도 가장 먼저 경비초소 노후화된 난방시설과 눈을 아프게 하는 낡은 조명시설 개선사업을 실천한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017년 6월 7일 받았던 한 통의 편지에 올바른 실천으로 답하기 위해서 4년 동안 나름대로 애써보았지만, 지나고 보면 온전하게 마치지 못한 일들도 있다. 나는 과연 그 편지에 올바른 답을 실천 해왔던 것일까? 라는 생각으로 입주자대표회의 임기를 마치던 즈음에 우체통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는 단지에서 청소 근로를 하는 한 어머님의 편지였다. 청소근로자의 어려운 점을 살피고 근무여건 개선을 위해서 했던 몇 가지 일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그 글은 입주자대표회의라는 마을활동을 마치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분의 편지 한 통은 나에게, 온전히 다 해내지는 못했어도, 많이 틀린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신기한 인연이다. 처음 이메일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또 다른 우편함 편지글 하나로 조용히 맺음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그 문장의 원래 의미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2017년부터 4년 동안 마을에서 배운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은 눈으로 살피기보다는 피부로 체감하는 일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의 차가움을 함께 경험하며 고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이었다. 온전히 그 속에 들어갔을 때에서야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에는 생각보다도 더 큰 힘이 있다. 그 힘을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이웃에게서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
가끔 지나가는 길에 마주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지점 글귀를 어느 날 마주하면서 마음이 철렁 내려 앉았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는 문구에서 2017년 6월 7일, 그날이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별할 것 없던 2017년 6월 7일 그날은, 오후에 받은 한 통의 이메일로 기억 속에서 잊기 어려운 날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공동주택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감사로서 마을 역할을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을 전혀 모르던 나는 이웃의 생각이라도 바르게 듣자는 마음에 연락처를 전 세대와 관리 주체 직원 모두에게 공개해둔 상태였다. 가끔은 만용에 가까운 이 일을 후회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렇게 생각 없이 내 연락처를 모두에게 공개한 덕분에 나는 마을 역할에서 조금 덜 실패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본인을 내가 사는 공동주택에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빠의 딸이라고 밝힌 분이 보내온 메일은 한 줄 한 줄이 읽기에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글이었다. 아직도 이메일을 간직하고 있는데, 장문의 이메일 중에서 몇 줄을 가져오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 아빠가 무악현대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계셔요..
작년에 아빠가 심하게 아프신 일이 있는데요.. 그게 더위 때문에 그랬다고 병원에서 알았어요.. 한번도 힘들다는 말씀 안하신 아빠인데.. 작년에는 참 많이 힘드셨는가봐요..
더위 먹어서 그렇다고 괜찮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직 제가 학교를 다니느라 도움이 못되어서 부끄러운데요.. 우연히 연락처를 알게 되어서요.. 아파트에서 간부님들께서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아빠가 너무 힘들게 올 여름도 지내실까봐 너무 걱정이 되어서어요.. 아빠 딸로 살면서 아빠가 항상 당당하신 모습만 봤었는데.. 이렇게 밖에 아빠에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편지 보낸 분이 죄송하다는 말로 맺는 이메일을 보고 나는 스스로 가슴을 쳤다. 10년 넘게 사는 곳 경비실에 냉방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잠시 막막해졌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공동주택의 행정절차는 사뭇 복잡하다. 특히나 공용부분 (경비실, 놀이터, 17종류의 주민 공용시설 등)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편지를 받고 현황을 파악했던 날은 6월이었지만, 그해 여름의 더위에 대비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2017년 6월 10일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틀 동안 12개 경비초소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분을 초소별로 찾아뵙고 사과부터 드렸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한가지 약속과 부탁도 드렸다. 한가지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해 안에 경비초소에 냉방시설을 도입하겠다는 약속이었고, 부탁은 상의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꼭 연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느 일방의 부탁이나 요청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진심과 선의가 신뢰로 맺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편지 한 통으로 시작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실무적인 절차를 실행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올바르게 일을 해도 어려운 자리이다. 서로 간 다른 이해관계의 중간 지점을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을 내려놓고 제멋대로 하면 쉬운 역할일 수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함께 활동하는 그 당시 입주자대표회의에는 양심을 쉽게 내려놓은 분은 없었다. 입주자대표회의 어려운 처지를 알기에 모든 과정에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웃에게 사실 알리기였는데, 소통을 시작한 이웃이 50세대, 100세대를 넘어가면서 모두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단지 경비실에 지금까지 냉방시설이 없습니다”
세대를 방문해서 이렇게 말을 꺼내면 놀라지 않는 이웃이 없었다. 너무 모르고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이웃도 있었고, 태양광 사업을 하는 이웃은 경비실에 냉방장치 빨리 설치하고 태양광 도입하는 것을 돕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중에서 생각나는 한 분은 그 자리에서 경비실 12곳 전부에 설치할 냉방장치를 기증하겠다는 분이었다. 여름 더위가 막 시작하는 6월 중순이라서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고, 공동주택에서 업무 절차가 얼마나 많은 과정으로 인해서 어려운 부분이 있는지를 잘 아는 이웃이었다.
처음 막막했던 마음은 이웃집을 100세대 방문을 마치던 시점에서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들은 이웃의 의견을 그대로 정리해서 입주자대표회의에 가지고 갔다. 2017년 6월 7일에 받았던 편지도 내용 빠짐없이 전해드렸고, 시기적절하게 서울시로부터 다음 내용과 같은 공문까지 올바른 판단에 힘을 실어주었다.
“「공동주택 관리조례」 제6조의2 및「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 제62조 제7항에 경비원의 처우개선에 관한 내용을 정하고 있으며,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한「산업 보건 기준에 관한 규칙」 제560조에서도 “사업자는 고열, 한냉, 다습작업이 실내인 경우에 냉난방 또는 통풍을 위하여 적절한 온도,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하여야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입주자대표회의회장님께 경비원의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도움을 주실 것을 공문으로 협조요청 드렸음을 알려드립니다.”
같은 해 여름 나는 공중전화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는데, 아마도 편지를 보낸 분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지난해 여름 경비초소에서 여름 한낮에 더위에 잠시 혼절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경비실에 냉방시설 설치가 되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편지 보낸 따님이 사랑하는 아버님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차마 따님 되는 분이 편지를 보내서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말씀을 전할 수는 없었다. 따님이 당신의 고통으로 아파했다는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연락에 감사하다는 인사 뒤 통화를 마쳤다.
특별하게 잘 지은 경비초소가 아니라면 대부분 공동주택 경비실의 여름철 실내 온도는 일기예보 온도보다 10% 이상 더 높다. 창문과 문을 열어 놓아도 온도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다. 한번은 휴가로 비어 있는 초소에서 온도계로 여름철 실내 온도 측정을 해본 일이 있었는데 최고온도가 42도 가까이 찍혀 있었다. 그날 일기예보 상 온도는 서울 33도였던 날이다. 직접 측정해보고 눈으로 온도계 숫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근무환경이었다. 냉방시설 설치를 마무리 한 일에 작은 보람을 느꼈다.
한 번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입주자대표회의 활동은 다음 해부터 2020년 6월까지 두 번째 임기를 회장이라는 역할로 수행하게 되었다. 지난 여름의 혹독한 환경을 직접 확인했기에, 겨울이나 봄, 가을에는 어려움이 없을지도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용히 관리 주체와 상의하여 경비초소에서 근무를 서 보았다. 요란하게 떠들면서 근무를 한번 한 뒤에, 두 번 더 근무하면서 현장의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24시간 동안 경비초소와 정문 근무, 야간 순찰을 일과 시간표대로 하고 나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노동의 강도가 높았다. 특히 야간 시간에 잠을 자다가 순찰을 나가야 하는 여건이나, 휴식 시간에도 찾아오는 택배 보관이나 긴급한 일들이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벌레에, 겨울에는 추위에 수면시간에도 잠자리가 편할 수는 없었다. 여러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에는 구조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새로운 기수의 입주자대표회의와 함께 조금씩 개선할 수 있었다.
공동주택 관리 주체에는 다양한 근무자가 있는데, 경비원 이외에도 청소근로자, 기전실 근무자와 같이 매일 공동주택의 시설 및 환경 관리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도 있다. 그리고 짐작하겠지만, 사회적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은 들여다보면 생각하지도 못한 그늘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사진은 과거 모습지만, 사는 단지의 근무자용 샤워 환경이었다. 급수펌프가 가동되는 시끄러운 환경은 둘째치고, 샤워하면서 주위로부터 몸을 가릴 부스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경비초소에서 근무했던 날 땀에 흠뻑 젖어서 이 상태에서 잠시 샤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생각이 미쳐서 알아본 직원 휴게시설과 샤워 시설은 나에게 또 하나의 냉방시설 없는 경비초소 같았다. 다행히 문제 인식과 해결에 뜻을 같이하는 입주자대표회의 덕분에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은 최소한의 샤워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은 되었다. 나는 임기가 끝났지만,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입주자대표회의는 지금도 선한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데, 마을공동체 활동에서 <모두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천하려 애쓰시는 모습이 늘 고맙다. 2021년에 실행하는 무악에너지자립마을 사업에서도 가장 먼저 경비초소 노후화된 난방시설과 눈을 아프게 하는 낡은 조명시설 개선사업을 실천한다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2017년 6월 7일 받았던 한 통의 편지에 올바른 실천으로 답하기 위해서 4년 동안 나름대로 애써보았지만, 지나고 보면 온전하게 마치지 못한 일들도 있다. 나는 과연 그 편지에 올바른 답을 실천 해왔던 것일까? 라는 생각으로 입주자대표회의 임기를 마치던 즈음에 우체통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 편지는 단지에서 청소 근로를 하는 한 어머님의 편지였다. 청소근로자의 어려운 점을 살피고 근무여건 개선을 위해서 했던 몇 가지 일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그 글은 입주자대표회의라는 마을활동을 마치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분의 편지 한 통은 나에게, 온전히 다 해내지는 못했어도, 많이 틀린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지나고 보면 모두가 신기한 인연이다. 처음 이메일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또 다른 우편함 편지글 하나로 조용히 맺음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그 문장의 원래 의미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2017년부터 4년 동안 마을에서 배운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은 눈으로 살피기보다는 피부로 체감하는 일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의 차가움을 함께 경험하며 고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과정이었다. 온전히 그 속에 들어갔을 때에서야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그늘을 읽는 일에는 생각보다도 더 큰 힘이 있다. 그 힘을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이웃에게서 볼 수 있었다.
2021-07-07 (No.50)
맛집 혜윰뜰
봄에 정식한 작물이 햇살을 머금고 쑥쑥 자라는 이맘때쯤이면, 혜윰뜰은 말 그대로 맛집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상추는 냉장고에 보름을 넣어두고 먹어도 그 맛과 식감이 변함없고, 이제 막 조금씩 수확을 시작하는 아삭이고추, 토마토는 싱그럽다 못해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낸다. 자연이 주는 싱싱함으로 무장한 혜윰뜰 맛집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채소는 마트에서 사서 먹기만 하다 혜윰뜰 텃밭에서 상추나 토마토를 수확해서 맛보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식물의 강한 생명력이다. 마트에서 사 온 상추를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가 깜빡하고 며칠 지난 뒤에 맛보려 꺼내 보면 어느새 많이 연약해진 모습에 아쉬울 때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식물이란 참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평생을 마트 채소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에 상추의 연약함은 어느덧 나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혜윰뜰 텃밭을 경험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이웃분이 많이 수확했다고 상추 한 꾸러미를 안겨 주셨는데, 평소 채소를 많이 먹지 않던 나는 이 많은 상추를 언제 다 먹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상추는 오래 보관하면 안 되는 채소라는 나의 상식도 염려하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받아온 상추를 그날 쌈 재료와 함께 실컷 먹고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한참을 잊었다. 일주일보다는 더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검은 봉투에 든 ‘그것’을 발견하고는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펼쳐진다. 시들시들하고 소금에 절인 듯 휘늘어진 상추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봉투를 열어 본다.
‘내가 착각한 것일까?’
봉투 안 상추가 오늘 사 온 것처럼 싱싱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 아내에게 상추 언제 새로 사 왔는지를 물어본다. 새로 사 온 것이 아니란다. 일주일도 더 전에 텃밭에서 수확하여 나눔 받아온 그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상추 봉지를 열어본다. 저쪽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시들어 있는 상추를 솎아낼 심산이다. 한참을 뒤져보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것일까?
수십 년을 다져진 마트 채소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상추란 원래 이렇게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면서도, 어떤 조건과 상황이 맞아서 우연히 벌어진 운 좋은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쌓여왔던 고정관념이 요동치는 것을 스스로 잠재워 본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그동안 내가 다져온 채소에 대한 고정관념이 말 그대로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상추 나눔을 받아 보았지만, 시들어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기를 요리의 생명은 신선한 재료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채소도 마찬가지다. 푸르고 탄탄한 생명력으로 꽉 찬 채소는 그 생명력 자체로 훌륭한 맛이 된다. 아삭거리는 식감, 혀를 맴도는 탄력, 목 넘기는 순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촉촉함까지. 상추 하나가 완벽하게 조화로운 공연을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면 나는 그 맛을 잠시 동안 음미하면서 행복감에 빠져든다. 맛집 혜윰뜰을 제대로 즐기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맛집 혜윰뜰을 발견한 행복감에 도시농부의 마음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해진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감에는 늘 시샘이 뒤따르는 법인지, 맛집 혜윰뜰을 나보다 더 일찍 발견하고 탐닉하는 녀석들이 있다. 도시농부는 해충이라 부르는 그 곤충들은 맛집 혜윰뜰의 진가를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그들은 어찌나 성급한지, 키우느라 애쓰고 있는 도시농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텃밭 현장에서 수확이라는 과정 없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곤 한다.
'맛집 혜윰뜰의 반갑지 않은 잔치'
봄과 여름을 거쳐서 만나게 되는 맛집 혜윰뜰 탐방객은 주로 진딧물, 배추좀나방, 굴파리 애벌레와 같은 작디작은 녀석들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혜윰뜰은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 농사를 지어서 가족이 함께 먹는 텃밭이기에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히 해충에게도 안전한 맛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반반씩 나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정성을 다해서 키운 작물의 어린 새순이 해충의 맛집 잔치로 노랗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속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봄을 지나는 동안 잠시 한눈을 팔다 보면 햇살이 뜨거워지는 시기에는 손쓰기 어려울 만큼 해충 맛집 잔치가 도시농부 눈 앞에 펼쳐진다.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다 보면, 맛집 혜윰뜰을 온전히 사람의 것으로 지키내기 위한 도시농부의 뜨거운 투쟁이 시작된다. 진딧물이 처음 보이는 시기에는 손수 만든 친환경 비법을 뿌려준다. 아직 번짐이 많이 시작되지 않은 시기에는 흔히 사용하는 물티슈 몇 장으로 진딧물이 보이는 곳을 깨끗이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보기도 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잎을 정리해주고, 닦아주다 보면 가끔은 선물 같은 여름의 수확을 맛보는 기쁨이 부지런한 도시농부에게 주어진다.
해충이라곤 해도 생명을 가진 녀석들이라, 서로 힘을 모아 공생하는 기특함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진딧물과 개미의 관계가 그렇다. 텃밭 일을 잘 아는 분의 표현을 빌린다면 개미가 많아지면 진딧물을 주의하라고 한다. 진딧물이 내뿜는 감로는 개미에게는 좋은 양식이 된다. 진딧물과 개미는 감로를 통해서 이른바 영양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좋은 감로를 지키기 위해서 개미도 필사적인지라, 진딧물에게 천적이 되는 다른 곤충의 침입을 막아준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지켜주는 모습이 기특하다가도 시든 새순을 보면, 마음 굳게 먹고 진딧물과 개미를 티슈로 닦아내고 친환경 비법으로 쫓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해충이 발생하면 사람도 서로 협력하게 된다. 한 곳에서 쫓아내도 다른 곳에 피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기에, 해충이라는 고난이 닥치면 사람도 협력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람이 자연을 닮은 것인지,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애초에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충이라는 고난이 도시농부에게 늘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걱정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기쁨이 맛집 혜윰뜰에는 고난 뒤에 찾아온다.
그러니, 맛집 혜윰뜰을 찾아 문전성시를 이루는 해충들의 잔치가 있다고 한들 어떠하랴. 그 고난이 있기에 추억도, 기억도, 함께 웃고 우는 삶의 이야기도 펼쳐지는 것을. 어쩌면 고난은 우리 삶을 진하게 다독여 주는 양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혜윰뜰 텃밭에서 느끼는 고난의 그림자 뒤편에는 다음 계절의 행복이 싹트고 있을 것을 알기에 오늘의 고난도 즐겁게 맞이해 본다.🍀
맛집 혜윰뜰
봄에 정식한 작물이 햇살을 머금고 쑥쑥 자라는 이맘때쯤이면, 혜윰뜰은 말 그대로 맛집으로 영업을 시작한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상추는 냉장고에 보름을 넣어두고 먹어도 그 맛과 식감이 변함없고, 이제 막 조금씩 수확을 시작하는 아삭이고추, 토마토는 싱그럽다 못해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낸다. 자연이 주는 싱싱함으로 무장한 혜윰뜰 맛집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채소는 마트에서 사서 먹기만 하다 혜윰뜰 텃밭에서 상추나 토마토를 수확해서 맛보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식물의 강한 생명력이다. 마트에서 사 온 상추를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가 깜빡하고 며칠 지난 뒤에 맛보려 꺼내 보면 어느새 많이 연약해진 모습에 아쉬울 때가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식물이란 참 연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평생을 마트 채소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에 상추의 연약함은 어느덧 나에게는 당연한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 당연한 사실이 혜윰뜰 텃밭을 경험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이웃분이 많이 수확했다고 상추 한 꾸러미를 안겨 주셨는데, 평소 채소를 많이 먹지 않던 나는 이 많은 상추를 언제 다 먹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상추는 오래 보관하면 안 되는 채소라는 나의 상식도 염려하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받아온 상추를 그날 쌈 재료와 함께 실컷 먹고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한참을 잊었다. 일주일보다는 더 긴 시간이 지난 뒤에 검은 봉투에 든 ‘그것’을 발견하고는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펼쳐진다. 시들시들하고 소금에 절인 듯 휘늘어진 상추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심스럽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봉투를 열어 본다.
‘내가 착각한 것일까?’
봉투 안 상추가 오늘 사 온 것처럼 싱싱하다.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착각할 만도 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면서, 아내에게 상추 언제 새로 사 왔는지를 물어본다. 새로 사 온 것이 아니란다. 일주일도 더 전에 텃밭에서 수확하여 나눔 받아온 그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상추 봉지를 열어본다. 저쪽 어딘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시들어 있는 상추를 솎아낼 심산이다. 한참을 뒤져보았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것일까?
수십 년을 다져진 마트 채소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산산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상추란 원래 이렇게 긴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놀라면서도, 어떤 조건과 상황이 맞아서 우연히 벌어진 운 좋은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쌓여왔던 고정관념이 요동치는 것을 스스로 잠재워 본다. 비슷한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에야 그동안 내가 다져온 채소에 대한 고정관념이 말 그대로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시인하게 된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상추 나눔을 받아 보았지만, 시들어 실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기를 요리의 생명은 신선한 재료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채소도 마찬가지다. 푸르고 탄탄한 생명력으로 꽉 찬 채소는 그 생명력 자체로 훌륭한 맛이 된다. 아삭거리는 식감, 혀를 맴도는 탄력, 목 넘기는 순간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촉촉함까지. 상추 하나가 완벽하게 조화로운 공연을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면 나는 그 맛을 잠시 동안 음미하면서 행복감에 빠져든다. 맛집 혜윰뜰을 제대로 즐기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맛집 혜윰뜰을 발견한 행복감에 도시농부의 마음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해진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감에는 늘 시샘이 뒤따르는 법인지, 맛집 혜윰뜰을 나보다 더 일찍 발견하고 탐닉하는 녀석들이 있다. 도시농부는 해충이라 부르는 그 곤충들은 맛집 혜윰뜰의 진가를 일찍부터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그들은 어찌나 성급한지, 키우느라 애쓰고 있는 도시농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텃밭 현장에서 수확이라는 과정 없이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자기들끼리 잔치를 벌이곤 한다.
'맛집 혜윰뜰의 반갑지 않은 잔치'
봄과 여름을 거쳐서 만나게 되는 맛집 혜윰뜰 탐방객은 주로 진딧물, 배추좀나방, 굴파리 애벌레와 같은 작디작은 녀석들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혜윰뜰은 가능하면 자연 그대로 농사를 지어서 가족이 함께 먹는 텃밭이기에 사람에게 해로운 것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연히 해충에게도 안전한 맛집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연과 사람이 반반씩 나누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다가도, 정성을 다해서 키운 작물의 어린 새순이 해충의 맛집 잔치로 노랗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속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봄을 지나는 동안 잠시 한눈을 팔다 보면 햇살이 뜨거워지는 시기에는 손쓰기 어려울 만큼 해충 맛집 잔치가 도시농부 눈 앞에 펼쳐진다.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다 보면, 맛집 혜윰뜰을 온전히 사람의 것으로 지키내기 위한 도시농부의 뜨거운 투쟁이 시작된다. 진딧물이 처음 보이는 시기에는 손수 만든 친환경 비법을 뿌려준다. 아직 번짐이 많이 시작되지 않은 시기에는 흔히 사용하는 물티슈 몇 장으로 진딧물이 보이는 곳을 깨끗이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보기도 한다. 여름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잎을 정리해주고, 닦아주다 보면 가끔은 선물 같은 여름의 수확을 맛보는 기쁨이 부지런한 도시농부에게 주어진다.
해충이라곤 해도 생명을 가진 녀석들이라, 서로 힘을 모아 공생하는 기특함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진딧물과 개미의 관계가 그렇다. 텃밭 일을 잘 아는 분의 표현을 빌린다면 개미가 많아지면 진딧물을 주의하라고 한다. 진딧물이 내뿜는 감로는 개미에게는 좋은 양식이 된다. 진딧물과 개미는 감로를 통해서 이른바 영양적 공생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좋은 감로를 지키기 위해서 개미도 필사적인지라, 진딧물에게 천적이 되는 다른 곤충의 침입을 막아준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지켜주는 모습이 기특하다가도 시든 새순을 보면, 마음 굳게 먹고 진딧물과 개미를 티슈로 닦아내고 친환경 비법으로 쫓아내는 일을 반복한다. 해충이 발생하면 사람도 서로 협력하게 된다. 한 곳에서 쫓아내도 다른 곳에 피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기에, 해충이라는 고난이 닥치면 사람도 협력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이쯤 되면 사람이 자연을 닮은 것인지,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애초에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충이라는 고난이 도시농부에게 늘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함께 걱정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기쁨이 맛집 혜윰뜰에는 고난 뒤에 찾아온다.
그러니, 맛집 혜윰뜰을 찾아 문전성시를 이루는 해충들의 잔치가 있다고 한들 어떠하랴. 그 고난이 있기에 추억도, 기억도, 함께 웃고 우는 삶의 이야기도 펼쳐지는 것을. 어쩌면 고난은 우리 삶을 진하게 다독여 주는 양념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혜윰뜰 텃밭에서 느끼는 고난의 그림자 뒤편에는 다음 계절의 행복이 싹트고 있을 것을 알기에 오늘의 고난도 즐겁게 맞이해 본다.🍀
2021-06-10 (No.49)
바지락 + 달래 된장찌개
혜윰뜰의 봄 농사가 시작되고 모종을 나누는 날이라, 오랜만에 텃밭을 찾았는데 뜻하지 않게 달래를 한 움큼이나 얻었다. 겨우내 심어 놓은 달래가 잎도 여리고 가느다란 것이 어찌 그 겨울을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달래다운 향긋함을 뽐내고 있었다. 잘 챙겨가서 꼭 맛있게 무언가 해 먹으라는 이웃 농부의 말에 조심스레 가지고 집으로 왔다.
달래는 참 쓰임새 많은 작물이다. 그대로 씻어서 송송 채를 썰어 양념장에 넣은 달래 장은 따뜻한 밥에 비벼 먹으면 감칠맛 넘치는 한 끼를 맛볼 수 있다. 향긋함을 그대로 살려서 달래 전을 해도 좋고 무침도 좋다. 특히 달래 무침은 잘 구워 기름기 빠진 삼겹살에 곁들여 먹으면 고기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특별한 비법 재료가 된다.
군침 넘어가는 생각은 많았지만 가장 무난한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달래 된장찌개를 끓일 때는 달래를 가장 마지막에 넣어주면 좋은데, 그렇게 하면 특유의 풍미와 향이 날아가지 않고 식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끓여 내온 달래 된장찌개가 한창 무르익은 봄의 맛으로 식탁을 가득 채운다. 달래 특유의 조금은 알싸한 맛에서, 온 겨울을 이겨낸 저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봄 농사는 가을 농사와 비교하면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있다. 덜 힘들어서 그렇다. 봄이라고 병충해 없는 것이 아니고, 손 가는 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가을 텃밭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혜윰뜰에는 가끔 벼룩잎벌레가 생기는데 이 녀석들이 봄 작물인 상추, 가지, 토마토, 고추와는 친하지 않아서 피해도 별로 생기지 않는 이유도 있다. 고추는 탄저병이라는 무서운 복병이 있지만, 혜윰뜰에서는 고추가 차고 습한 바람에 병들기 전에 수확을 마치는 터라, 봄 농사에는 작은 여유로움이 있다.
봄 농사가 즐거운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겨울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만나는 첫 번째 도시농부 활동이기 때문이다. 달래가 겨울 동안 추위 속에서 더 향긋해진 것처럼 도시농부도 겨울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림을 통해서 농부의 에너지를 채우게 된다. 그러니 여러모로 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는 행복한 시간이다. 씨 뿌려 애써 키운 열무잎 사이를 톡톡 뛰어다니는 벼룩잎벌레를 쫓아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유로움과 기다림 끝에 만나는 행복한 시간에 더해서 혜윰뜰의 봄 농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새로운 이웃의 참여다. 혜윰뜰은 천 세대 가까운 이웃 중에서 신청을 받아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매년 새봄이 오면 새롭게 참여할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밭을 내어주는 이웃이 나온다. 그 밭에는 새봄에 새로운 도시농부가 함께하게 되는데 여느 마을공동체 활동이 그렇듯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에도 새로운 도시농부, 새 이웃은 공동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호기심 넘치는 새내기 도시농부의 눈빛에 텃밭 구석구석이 밝아지고 활기가 찾아온다.
새로운 회원이 참여하면 가장 먼저 전하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같은 만년 초보 농부가 새로운 회원이 품은 도시농업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줄 리는 만무하다. 대부분 질문은 나 역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일 때가 많다. 특히나 시시각각 자연의 선택에 따라 변화하는 텃밭은 가끔 밭일을 돌보는 나에게는 늘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다 보니 신입회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가장 많이 하는 답은 이렇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렇다 보니, 도시농업공동체 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때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혜윰뜰 회원도 대표라는 자에게 도시농업에 대해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부끄러움이 덜해졌지만, 활동 초반에는 모르는 일을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야 할 때, 목에 그 말이 턱하고 걸려서 쉽게 꺼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이제는 수년 차 경험이 쌓인 선배 도시농부들이 있기에, 내가 질문받는 일은 거의 없어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혜윰뜰은 원래 마을에 있는 작은도서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부르다 보니 정감 어리고 특별해져서 도시농부의 활동도 같은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도시농업 이전에 혜윰뜰 작은도서관에서 더 먼저 태어난 주민공동체가 있는데, (희한하고 느슨한) 독서모임 책수다라고 한다. 책을 통한 인문학 평생학습 동아리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책 이야기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가는 이웃들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달래를 한 움큼 건네준 회원도 책수다에서 먼저 인사를 나눈 이웃이다. 함께 책을 읽던 인연이 이어져서 텃밭에서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참 우연하게도 달래를 얻은 다음 날, 또 다른 책수다 회원에게 바지락을 조금 얻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바지락을 잘 해감하고 하나씩 까서 정성스럽게 냉동해서 독서모임 회원과 나눔 한 것인데, 염치없이 나도 한 덩이를 얻었다. 아까워서 다 먹지 못하고 모셔두었던 달래가 생각나서 이번에는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역시나 그 맛이 기막히다. 원래 향긋했던 달래 된장찌개에 바지락의 바다내음 더한 짭조름한 감칠맛이 더해지니 어제 맛보았던 그 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함이 있다.
바지락 조금 더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맛이 달라지다니! 감탄하다 문득 그 특별한 맛의 이유가 느껴졌다. 사실 텃밭에서 나는 작물은 가까운 마트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달래는 사시사철 맛볼 수 있고 바지락 역시 그렇다. 그런데 마트에서 사 온 재료로 요리를 하면 이렇게 특별한 맛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달래는 품종도 거의 변화가 없어서 맛이 다를 리 없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문득 알게 된다. 이웃과 나눔을 통해서 얻은 달래에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바지락도 그렇다. 즐겁게 먹어줄 이웃을 생각하며 해감하고 껍질을 제거해서 먹기 좋게 냉동해서 건네준 것에는 그것만의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요리하면서도 그 마음이 좋아서 식탁을 준비하는 시간이 즐거워진다. 누군가의 배려와 정성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과 안도감이 찾아온다.
혜윰뜰 텃밭과 작은도서관에서 나눔 받은 달래와 바지락이 만나서, 내 솜씨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 즐거운 맛의 요리가 완성되는 경험을 하면서 또 다른 상상을 해본다. 서로 다른 마을공동체가 어울려 함께 할 수 있을 때, 만나게 될 새롭고 깊은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마을에서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의 그것과도 같은 향긋하고 감칠맛 가득한 봄소식이 가득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웃에게 이야기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 편히 이야기해달라고. 비록 그것이 앞 못 보는 이 둘이서 밤길을 걷는 일이 된다 해도 덜 외로운 길이 될 테니까. 서로의 정성과 배려가 마주하며 싹트는 혜윰뜰 텃밭의 작은 행복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기를 희망하며.
바지락 + 달래 된장찌개
혜윰뜰의 봄 농사가 시작되고 모종을 나누는 날이라, 오랜만에 텃밭을 찾았는데 뜻하지 않게 달래를 한 움큼이나 얻었다. 겨우내 심어 놓은 달래가 잎도 여리고 가느다란 것이 어찌 그 겨울을 살아남았는지 모르지만, 달래다운 향긋함을 뽐내고 있었다. 잘 챙겨가서 꼭 맛있게 무언가 해 먹으라는 이웃 농부의 말에 조심스레 가지고 집으로 왔다.
달래는 참 쓰임새 많은 작물이다. 그대로 씻어서 송송 채를 썰어 양념장에 넣은 달래 장은 따뜻한 밥에 비벼 먹으면 감칠맛 넘치는 한 끼를 맛볼 수 있다. 향긋함을 그대로 살려서 달래 전을 해도 좋고 무침도 좋다. 특히 달래 무침은 잘 구워 기름기 빠진 삼겹살에 곁들여 먹으면 고기 요리의 느끼함을 잡아주는 특별한 비법 재료가 된다.
군침 넘어가는 생각은 많았지만 가장 무난한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달래 된장찌개를 끓일 때는 달래를 가장 마지막에 넣어주면 좋은데, 그렇게 하면 특유의 풍미와 향이 날아가지 않고 식탁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잘 끓여 내온 달래 된장찌개가 한창 무르익은 봄의 맛으로 식탁을 가득 채운다. 달래 특유의 조금은 알싸한 맛에서, 온 겨울을 이겨낸 저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봄 농사는 가을 농사와 비교하면 조금은 마음에 여유가 있다. 덜 힘들어서 그렇다. 봄이라고 병충해 없는 것이 아니고, 손 가는 일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가을 텃밭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혜윰뜰에는 가끔 벼룩잎벌레가 생기는데 이 녀석들이 봄 작물인 상추, 가지, 토마토, 고추와는 친하지 않아서 피해도 별로 생기지 않는 이유도 있다. 고추는 탄저병이라는 무서운 복병이 있지만, 혜윰뜰에서는 고추가 차고 습한 바람에 병들기 전에 수확을 마치는 터라, 봄 농사에는 작은 여유로움이 있다.
봄 농사가 즐거운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겨울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고 만나는 첫 번째 도시농부 활동이기 때문이다. 달래가 겨울 동안 추위 속에서 더 향긋해진 것처럼 도시농부도 겨울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림을 통해서 농부의 에너지를 채우게 된다. 그러니 여러모로 봄 농사는 도시농부에게는 행복한 시간이다. 씨 뿌려 애써 키운 열무잎 사이를 톡톡 뛰어다니는 벼룩잎벌레를 쫓아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유로움과 기다림 끝에 만나는 행복한 시간에 더해서 혜윰뜰의 봄 농사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새로운 이웃의 참여다. 혜윰뜰은 천 세대 가까운 이웃 중에서 신청을 받아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매년 새봄이 오면 새롭게 참여할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밭을 내어주는 이웃이 나온다. 그 밭에는 새봄에 새로운 도시농부가 함께하게 되는데 여느 마을공동체 활동이 그렇듯이 혜윰뜰 도시농업공동체에도 새로운 도시농부, 새 이웃은 공동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호기심 넘치는 새내기 도시농부의 눈빛에 텃밭 구석구석이 밝아지고 활기가 찾아온다.
새로운 회원이 참여하면 가장 먼저 전하는 말이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같은 만년 초보 농부가 새로운 회원이 품은 도시농업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줄 리는 만무하다. 대부분 질문은 나 역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일 때가 많다. 특히나 시시각각 자연의 선택에 따라 변화하는 텃밭은 가끔 밭일을 돌보는 나에게는 늘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다 보니 신입회원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가장 많이 하는 답은 이렇다.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렇다 보니, 도시농업공동체 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지함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때가 많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혜윰뜰 회원도 대표라는 자에게 도시농업에 대해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부끄러움이 덜해졌지만, 활동 초반에는 모르는 일을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해야 할 때, 목에 그 말이 턱하고 걸려서 쉽게 꺼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이제는 수년 차 경험이 쌓인 선배 도시농부들이 있기에, 내가 질문받는 일은 거의 없어서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혜윰뜰은 원래 마을에 있는 작은도서관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부르다 보니 정감 어리고 특별해져서 도시농부의 활동도 같은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도시농업 이전에 혜윰뜰 작은도서관에서 더 먼저 태어난 주민공동체가 있는데, (희한하고 느슨한) 독서모임 책수다라고 한다. 책을 통한 인문학 평생학습 동아리라고 하면 조금 거창하지만, 책 이야기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가는 이웃들이 함께하는 모임이다. 달래를 한 움큼 건네준 회원도 책수다에서 먼저 인사를 나눈 이웃이다. 함께 책을 읽던 인연이 이어져서 텃밭에서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참 우연하게도 달래를 얻은 다음 날, 또 다른 책수다 회원에게 바지락을 조금 얻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바지락을 잘 해감하고 하나씩 까서 정성스럽게 냉동해서 독서모임 회원과 나눔 한 것인데, 염치없이 나도 한 덩이를 얻었다. 아까워서 다 먹지 못하고 모셔두었던 달래가 생각나서 이번에는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를 끓였다. 역시나 그 맛이 기막히다. 원래 향긋했던 달래 된장찌개에 바지락의 바다내음 더한 짭조름한 감칠맛이 더해지니 어제 맛보았던 그 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함이 있다.
바지락 조금 더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맛이 달라지다니! 감탄하다 문득 그 특별한 맛의 이유가 느껴졌다. 사실 텃밭에서 나는 작물은 가까운 마트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달래는 사시사철 맛볼 수 있고 바지락 역시 그렇다. 그런데 마트에서 사 온 재료로 요리를 하면 이렇게 특별한 맛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달래는 품종도 거의 변화가 없어서 맛이 다를 리 없는데 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문득 알게 된다. 이웃과 나눔을 통해서 얻은 달래에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바지락도 그렇다. 즐겁게 먹어줄 이웃을 생각하며 해감하고 껍질을 제거해서 먹기 좋게 냉동해서 건네준 것에는 그것만의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요리하면서도 그 마음이 좋아서 식탁을 준비하는 시간이 즐거워진다. 누군가의 배려와 정성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과 안도감이 찾아온다.
혜윰뜰 텃밭과 작은도서관에서 나눔 받은 달래와 바지락이 만나서, 내 솜씨로는 낼 수 없는 깊은 맛, 즐거운 맛의 요리가 완성되는 경험을 하면서 또 다른 상상을 해본다. 서로 다른 마을공동체가 어울려 함께 할 수 있을 때, 만나게 될 새롭고 깊은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마을에서 바지락 달래 된장찌개의 그것과도 같은 향긋하고 감칠맛 가득한 봄소식이 가득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웃에게 이야기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마음 편히 이야기해달라고. 비록 그것이 앞 못 보는 이 둘이서 밤길을 걷는 일이 된다 해도 덜 외로운 길이 될 테니까. 서로의 정성과 배려가 마주하며 싹트는 혜윰뜰 텃밭의 작은 행복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기를 희망하며.